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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린 먼로는 1926년 6월 1일, 노마 진 모튼슨(Norma Jean Mortenso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자라서는 어머니의 성을 따 노마 진 베이커(Norma Jean Baker)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할리우드의 크고 작은 스튜디오에서 필름 편집 일을 했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사생아로 태어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 글레이디 펄 베이커는 가난한 데다 정신병까지 앓고 있던 미혼모로 딸을 다른 집의 양녀로 보낸다. 그리하여 먼로는 아홉 살 때부터 고아원과 보육원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비행기 공장에서 일하던 먼로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42년 6월 19일, 지미 도허티(Jimmy Dougherty)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잘생긴 남학생으로 댄스 파티에서 만난 열다섯 살 먼로에게 반해 데이트를 거듭하던 중 아예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4년 만인 1946년에 끝이 났다. 그녀가 이른 결혼을 한 이유는 아마도 지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의집살이에서 도피해보려는 생각에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먼로는 무기 공장의 페인트 공으로 일자리를 얻는다. 그곳에서 만난 한 해군 사진작가가 그녀를 모델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들은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는 현재의 포르노물과 같은 수준으로 상당히 외설적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군부대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모델 에이전시가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 일은 그녀를 그야말로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마침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났을 때인데, 1945년 말에 이미 무려 33개 주요 잡지의 핀업 걸로 등장했을 정도였다. 1946년, 그녀는 공장을 그만두고 첫 남편 지미 도허티와 이혼한 후 풀타임 모델로 변신한다.
20세기폭스필름은 그녀와 주 125불로 계약을 맺자마자 스타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대중들이 금발을 좋아한다는 것을 간파한 할리우드는 메릴린 먼로의 머리카락을 빨간색이 들어간 짙은 갈색에서 금발로 바꾸었다. 이때 이름도 ‘노마 진 베이커’에서 ‘메릴린 먼로’로 바꾸었다. 메릴린은 여배우 메릴린 밀러에서 따왔고 먼로는 그녀의 외할머니 성이었다.
메릴린은 엑스트라로 첫 데뷔를 했다. 〈스쿠다후 스쿠다헤이〉, 〈미스 필그림의 쇼킹〉에 엑스트라로 출연했고, 1950년에 존 휴스턴 감독의 스릴러물 〈정글 아스팔트〉와 〈이브의 모든 것〉에서 비교적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았다. 그녀는 그동안 할리우드를 주름 잡던 여배우들과는 달랐다. 풍만한 몸매에 곱슬곱슬한 금발머리, 얼굴 어딘가 찍혀 있는 매력 점, 도톰하며 살짝 벌어진 입술, 어딘가 나른하고 멍한 듯 보이는 푸른 눈, 이것은 메릴린 먼로의 외모이지만 동시에 전형적인 미국 미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강한 남성상을 강조하고 있었으므로 백치미를 가진, 어딘가 둔하지만 순진해 보이고 보호해줘야 할 것 같은 매력을 가진 먼로야말로 적격인 인물이었다. 먼로의 대명사라고도 볼 수 있는 약간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과 약간은 졸린 듯 보이는 시선에 남성들이 환호한 까닭은 그녀의 표정이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방금 누군가와 환상적인 섹스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다음 상대는 당신이 될 수도 있어요.
그녀야말로 당대의 남성들이 확실히 상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구나 먼로는 관능미에다 어린 소녀의 천진무구함과 연약함을 결합했는데, 그녀가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한마디로 그녀를 본 어떤 남자라도 그녀의 든든한 보호자를 자처하고 나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1952년 잘 나가던 그녀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그녀가 한참 돈이 궁할 때 50달러를 받고 찍었던 누드 사진이 달력으로 제작되어 발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사에서는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배우 생활을 끝장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먼로는 당대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주간지 『라이프』를 찾아가 솔직하게 당시의 상황을 고백했다. 『라이프』는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오히려 먼로에 대한 대대적인 특집호를 내주었다. 이것이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를 위협하던 영화사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치솟자 곧바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고 그녀의 주가는 놀라울 만큼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가를 더욱 올린 것은 야심만만한 젊은이인 휴 헤프너가 1953년 12월에 창간한 『플레이보이』에 문제의 누드 사진들을 게재한 사건이었다. 헤프너가 달력 회사와 접촉하여 거금 500달러를 들여 판권을 사들인 후 「이달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삽입했는데 이 기사는 메릴린 먼로의 위상을 높여 준 것은 물론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매우 유명한 자료가 되기도 했다. 그녀의 누드 사진이 미국 대중매체에 실린 최초의 컬러 누드 사진이 된 것이다.
헤프너의 『플레이보이』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헤프너는 한 부에 50센트나 되는 창간호가 성공할 것으로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잡지에 발행인의 이름과 발행 날짜를 고의적으로 넣지 않았다. 그런데 3만 부는 팔려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던 잡지는 무려 5만 4천 부나 팔리며 대성공을 거뒀고 불과 3년 만에 50만 부가 팔렸다. 1959년에는 『에스콰이어』를 뛰어넘어 매월 100만 부를 팔았다. 학자들은 『플레이보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요인으로 헤프너가 메릴린 먼로라는 모델을 창간호에 활용한 것을 꼽는다.
메릴린 먼로는 『플레이보이』가 공전의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쁨을 만끽하면서 1954년 1월 14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당대의 야구 슈퍼스타 조 디마지오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언론은 이들의 결혼을 ‘세기의 커플’이라고 떠들어댔다. 이들의 결혼은 정말로 주목받을만했다.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야구 선수와 영화배우가 결혼했기 때문이다. 먼로는 디마지오와의 결혼을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는 야구 선수일 뿐만 아니라 만능 스포츠맨이다. 나보다 한 뼘은 키가 크다. 내가 머리 가르마를 탈 때 조는 뒤에서 그것을 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일 년도 채 못 가서 이혼한다. 이혼 사유는 직업상의 갈등이지만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사실 두 사람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결혼식에서부터 드러났다. 미국 야구 역사상 아직도 깨지지 않는 56게임 연속 안타를 기록한 후 은퇴한 슈퍼스타인 디마지오는 결혼식을 조용하게 치르자며 결혼 신고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시청에 함께 도착했다.
문제는 타자기였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청에는 타자기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에 결혼 증명서를 발급받기까지 시간이 걸리자 먼로는 자신과 계약한 20세기폭스필름사에 결혼 사실을 알려주었다.
20세기폭스필름으로서는 자신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한다는 소식을 보내온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들의 대처는 재빨랐다. 메릴린 먼로가 시청에서 전화를 건 지 30분도 안 되어 수많은 관중이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관중들은 디마지오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먼로를 보러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먼로가 자신의 나이를 28세가 아닌 25세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허니문 후반에 두 사람은 일본으로 날아갔다. 본래 이것은 디마지오가 계획한 것으로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야구계의 우상인 옛 친구 오들에게 “일본 순회 여행에 동행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디마지오는 2년 전 도쿄에서 은퇴 시합을 한 적도 있었으므로 일본의 야구 시즌 개막도 볼 겸 먼로와 함께 떠날 여행지로 일본을 선정한 것이다. 이때의 여행은 전적으로 디마지오의 의사였다.
그러나 디마지오와 먼로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은 역전되었다. 야구계의 슈퍼스타인 디마지오를 환영하리라 생각하고 일본에 도착하였지만 일본인들은 디마지오가 아니라 먼로에게 열광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하는 길가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은 온통 “먼로”를 외쳤다. 호텔에서는 경관 200여 명이 지키고 서서 관중들이 먼로에게 다가가는 것을 철저히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팬들은 연못에 빠지기도 하고 회전문에 끼이기도 했으며 쇼윈도 유리를 깨기도 했다.
디마지오를 더욱 낙담하게 한 것은 부인과 함께 있는 그에게 기자들이 다가와 자신을 “미스터 먼로”라고 불렀다는 점이었다. 한편 먼로는 한 인터뷰에서 속옷을 입었느냐는 질문에 “내일 옷을 살 거에요”라고 대답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디마지오를 정말로 화나게 한 것은 한 장군이 그들 부부에게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를 위문해주지 않겠느냐고 질문했을 때이다. 디마지오가 “기꺼이”라고 대답했는데 장군은 “당신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 물은 거지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불쾌한 순간이지만 신혼여행이므로 꾹 참았는데 장군은 한술 더 떠 디마지오에게 ‘미스터 먼로’로서 한국에 동행하겠느냐 아니면 먼로만 한국을 방문케 하고 그는 일본에 머물겠느냐고 질문했다. 자존심이 강한 디마지오는 후자를 선택했고 먼로는 한국으로 향했다.
먼로가 한국행을 결정한 이유는 한국에서 콘서트를 여는 것이 애국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방문할 미군 부대는 미국의 정예부대인 해군 제1사단이었다. 먼로의 위문 공연은 나흘 동안 계속되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먼로를 영화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먼로가 인기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장병들은 먼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부대를 방문하기 2개월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간된 『플레이보이』 창간호에 먼로가 표지 모델로 나왔기 때문이다.
- 1~2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병사를 위해 위문 공연에 나선 메릴린 먼로
하지만 이 여행은 두 사람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그녀의 위문 공연은 그야말로 전 세계를 강타했고 병사들은 열광했다. 그녀는 당대의 할리우드 스타였음에도 다른 배우와는 달리 깐깐하지 않았다. 그녀는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하면 누구와도 찍어주었다. 먼로도 이 당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두 함께라는 느낌이었어요.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여주고, 또한 나를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지요. 소망이 이루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먼로가 한국에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은 디마지오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먼로는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인 디마지오에게 기쁨을 전했다.
메릴린 먼로: 조, 너무 굉장했어요. 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환성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지 알아요?
조 디마지오: 알지. 그런데 내 경우는 칠만 오천 명이었어.
먼로의 여행은 두 사람 사이를 결정적으로 금가게 하였다. 자존심이 강한 디마지오가 손찌검까지 하자 먼로는 9개월 만에 두 번째 이혼 도장을 찍는다. 이혼 후에도 디마지오가 먼로를 사랑했다는 것은 전설로 통할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폐암으로 죽기 직전에 변호사에게 한 “먼로를 다시 볼 수 있겠어”란 말은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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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김정미,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눈과마음, 2007).
- ・ 제인 빌링허스트, 석기용 옮김, 『요부, 그 이미지의 역사』(이마고, 2005).
- ・ 전성원,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인물과사상사, 2012).
- ・ 귀도 크노프, 이동준 옮김, 『광기와 우연의 역사 2』(자작나무, 1996).
글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
출처
람세스에서 메릴린 먼로까지 역사 인물에 얽힌 세계 미스터리의 진실과 거짓을 밝힌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과 인류가 남기고 간 수많은 흔적을 탐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