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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1년 4월 2일, 평남 평양(平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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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8년 4월 19일 |
본관 | 남원(南原) |
주요활동 | 1904년 대한매일신보 창간, 1907년 신민회 결성, 국채보상운동, 신민회의 해외 독립군 기지개척 주도, 1920년대 초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 주도, 통의부 ・ 정의부 결성, 1923년 의성단 조직, 1926년 고려혁명당 조직,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1935년 한국독립당 이사장,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 참여 |
포상훈격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
관련 인물/단체 | 독립협회, 신민회, 대한광복회, 통의부, 정의부, 동성한족생계회, 남만한족통일회, 의성단, 전만통일회주비회, 동우회, 농민호조사,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려혁명당, 조선혁명자후원회, 한국독립당, 민족혁명당, 조선혁명당 |
1871년 4월 2일 평남 평양(平壤)에서 부친 시영(時英)과 모친 인동 장씨 사이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본적지인 평남 강서군 쌍룡면 신경리(新慶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명은 의종(宜鍾)이고, 자는 자명(子明), 호는 우강(雩崗), 필명은 우강(于岡), 우강인(于岡人), 우강산인(于岡散人) 등이다. 본관은 남원이며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다.
어려서 마을의 사숙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886년 16세에 외아문(外衙門)의 제중원(濟衆院) 학생 선발에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 외국어학교에서 영어와 화학, 제약, 의술 등을 배웠으나 교수와의 갈등으로 6개월만에 퇴교하고 이후 독학으로 영어 실력을 쌓았다. 1892년경부터 부친과 함께 게일(T. S. Gale)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에 참여하였다. 1895년경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896년 5월부터 1년가량 나가사키(長崎) 상업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로 근무하였다.
1897년 5월 귀국과 동시에 독립협회(獨立協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입회와 동시에 총무급의 직위에 임명된 것으로 보아 귀국 전부터 독립협회와 연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1월경 만민공동회의 시위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이승만(李承晩) 등과 구속되었다. 1901년 ‘사전주조(私錢鑄造)’ 혐의로 체포되어 태형 100도와 종신징역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이승만 등과 옥중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2년 만인 1903년 3월 출옥 후, 미국인이 운영하던 한성전기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1904년 3월 궁내부(宮內府) 소속 예식원(禮式院)의 번역관보에 임명되어 1905년 11월까지 근무하였다. 번역관보로 근무하며 러일전쟁 발발 이후 각국 공사관의 외교문서를 직접 취급함으로써, 일본의 주권침략 야욕을 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예식원에 근무하던 1904년 7월 황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영국인 베델(Ernest Bethell)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신문 창간 때부터 관여하여 신문 발간 일체를 관장하는 총관리인으로 실제적인 운영을 맡았다.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발행인이었지만, 양기탁에 의해 주도되었다. 창간 초기에는 예식원과 신문 업무를 겸직하며 고종과 항일언론계의 가교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튿날 예식원을 사직하고, 신문 업무에 전념하였다.
1905년 8월 11일자부터 국한문 혼용체제로 편집과 체제를 일신하였다. 기사와 논설 내용도 친일 정권의 무능, 부패와 일제의 국권침탈을 비판하는 국권수호활동에 치중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자 고정 난을 정해 놓고, 의병 활동을 소상하게 소개하였다. 을사늑약 때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자결기사와 이를 추앙하는 글을 게재하여 민중의 의협심을 북돋웠다.
1908년 3월에는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이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의열투쟁의 전모를 상세히 보도하였다. 장인환, 전명운의 행적을 기록한 『양의사합전(兩義士合傳)』을 국내에 배포하는 한편,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되자 두 의사를 후원하는 의연금 모금을 주도하였다.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일제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수호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등 항일 언론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1907년 1월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회장 김광제(金光濟)와 부회장 서상돈(徐相敦) 등이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를 발표하자, 이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만들고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사무소를 설치한 후 검사원에 선임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관하였다. 신문사가 직접 국채보상의연금을 모금하고, 모금란을 늘리면서까지 의연자의 성명과 액수를 게재하였다. 이를 통해 경제적 항일운동을 범국민적 애국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1908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사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 모은 의연금은 15만 원에 달했다.
1908년 7월 12일 일제는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를 조작하여 구속하였고, 구금된 지 64일 만인 1908년 9월 25일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그 새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도 식었고, 친일배의 농간으로 의연금 일부도 빼앗기고 말았다.
이외에도 대한자강회, 광무사, 국문연구소, 서우학회 등의 계몽운동단체에도 회원, 찬성원 등으로 참여하였다. 또 『가뎡잡지』와 『대한학회월보』, 『서우』, 『서북학회월보』, 『공업계』 등 계몽지에 글을 발표하여 부녀자, 아동, 청소년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 1대한매일신보사 편집국 모습
- 2대한매일신보사 공무국 문선공들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양기탁은 발기인 모임을 주재하고, 신민회의 총감독에 선임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였고 신민회의 총본부였다. 안창호 등과 신민회가 주도한 교육, 계몽강연,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이끌었다.
1909년~1910년 수차례 자신의 집에서 신민회 간부회의를 개최하여,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신민회 간부들의 국외 망명과 독립운동 자금모집 계획을 주도하였다.
1911년 1월 황해도 안악 지방에서 안명근(安明根)이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로 인해 신민회의 존재가 노출되어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등 망명계획을 추진한 인사들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주도자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고, 다시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4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감형되어 1915년 2월 출옥한 후, 12월경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망명하였다. 신민회의 핵심주체로서 독립군 기지개척 계획을 총괄하였으므로, 신민회를 중심으로 해외 각지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한 노력은 그의 민족운동에서 큰 줄기이자, 행동강령이 되었다.
1915년 말부터 신채호와 함께 안동여관을 거점으로 국내외 인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의열투쟁을 지도하였다. 그해 12월 대한광복회는 대구지역 부호들을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광명리에서 우편마차를 공격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16년 7월에는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丹東)에서 박상진(朴尙鎭)과 만나 운동방안을 논의하였다.
1917년 12월 『한인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이듬해 3월 이동녕(李東寧) 등과 만주지역 대표로 하바롭스크(Khabarovsk)에서 개최된 한인정치망명자대회에 참석하였다. 1918년 5월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창당에 관여하였으나, 직책은 맡지 않았다. 그는 한인사회당이 군사부의 사업으로 하바롭스크에 설립한 사관학교에 서간도 백서농장 소속 군인 50~60명을 파견하였다.
1917년 12월에 오주혁, 정안립(鄭安立) 등과 함께 만주지방 동포들의 생계를 증진하고 안정을 꾀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목적으로 동성한족생계회(東省韓族生計會)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918년 톈진(天津)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중국 재류금지 3년과 거주 제한처분을 받았다.
1920년 4월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고문 겸 편집감독에 추대되었다. 평소 민족종교를 통한 민족정신의 통일과 앙양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1920년 민족종교인 통천교(統天敎)를 창시하였다. 통천교는 천도교와 시천교, 제세교, 경천교, 청림교, 태을교의 6교를 합한 것으로 대체로 동학에 기반을 두었다.
1920년 상하이에 있는 안창호와 연계하여, 8월 24일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미국 국회의원 방한단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려다가 발각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22년 1월 서간도의 광복군총영에서 파견한 이관린과 장철호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콴디엔현(寬甸縣)에 들어서면서 제일성(第一聲)이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었다.
1922년 5월 25일에는 펑톈성 환런현(桓仁縣)에서 국민대표회 남만촉성회(國民代表會南滿促成會)가 조직되었는데,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만들어 남만주 지역 전 독립군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였다. 1922년 8월초 각 독립군단체의 통일 및 금후의 방침을 결정할 목적으로 환런현(桓仁縣) 마권자에서 통군부를 비롯하여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관전동로한교민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광복군총영, 평북독판부 등 이른바 8단 9회의 인사 71명의 모임을 주도하여, 8월 30일 남만주지역 독립군의 통합조직인 통의부(統義府)가 결성되었다.
통의부는 남만주 한인을 대상으로 자치활동을 펼치며, 준국가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통의부의 결성을 주도한 다음,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1922년 10월 복벽주의 계열의 독립군 병사들에게 주요간부와 함께 포박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서 전덕원(全德元) 등 복벽주의계 인사들은 1923년 2월 통의부에서 분립하여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라는 새로운 독립군단을 만들었다. 또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개조를 위해 활동토록 하였다.
1923년 8월경 편강렬(片康烈)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하고 고문에 추대되었다. 교통 요지인 길장선의 카륜(卡倫)에 본부를 두고 하얼빈(哈爾濱)시 이남 길장 연선, 남만 연선 한인사회의 통일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이후 지린(吉林), 창춘(長春) 일대에서 친일 주구배 처단, 군자금 모집, 일제 관공서 습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1월 중순 지린(吉林)에서 남만통일발기주비회를 소집하였는데, 독립운동 단체 데표 30여 명이 참가하였다. 참석자 전원을 통일단체 조직을 위한 교섭위원으로 각 단체에 파견되었다.
이어서 1924년 3월 하순에는 전만통일회주비회를 결성하였고, 남만주지역 독립군 지도자인 이장녕(李章寧), 지청천(池靑天), 손일민(孫一民) 등을 설득하여 1924년 7월 각 단체의 대표들이 지린에 모여 주비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1월 24일 대한통의부, 대한광정단, 서로군정서, 길림주민회, 노동친목회, 의성단, 잡륜자치회, 고본계 등 8개 단체가 경제와 산업, 교육에 힘쓰고 광복사업에 일로매진하기 위해 대동 통일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였다.
정의부는 남만 동서지역의 대표적인 군사단체들을 망라한 최고의 독립군단이었다. 또 남만지역 한인들의 자치를 위한 민정(民政)과 항일군사활동의 군정(軍政)을 동시에 추진한 군정부(軍政府)의 성격을 지녔다. 이런 정의부의 최고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한 때는 재무위원에 선임되어 정의부의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으나, 원로로서 독립운동단체 간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후 정의부에서는 지청천 등과 함께 권유위원으로 임명되어 참의부와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5년 초부터 두 사람은 참의부 관할지역인 류허현 삼원보(三源堡)에 파견되었으나 참의부측의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다.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이유필 등과 협의를 거쳐 정의부와 신민부 주요 지도자들의 연석회의를 준비한 결과 1925년 5월 25일 류허현 삼원포에서 정의부측의 현정경, 지청천, 오동진, 김동삼 등 신민부측의 김좌진, 박두희, 현천묵, 최문일 등, 그리고 임시정부측의 이유필과 모여 통합방안을 논의하였다. 논의 과정에서 각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의 거중 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 결과 7월 28일부터 열린 정의부 중앙총회에서는 ‘임시정부 각원의 반 수 이상을 정의부 인사로 임명한다’는 조건으로 상하이 임시정부 참여를 의결하였다.
이와 함께 만주지역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도 힘을 쏟았는데, 1924년 1월 손정도(孫貞道) 등과 구심점이 될 단체로 동우회(同友會)를 결성하였다. 통의부의 주요 인사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동우회는 만주 한인의 교육진흥과 경제자립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였다. 정의부 결성 이후에는 동우사의 사장을 맡아 체제를 정비하고, 박기백을 주간으로 기관지 『동우』를 간행하였다.
또 1924년 12월에는 손정도, 배형식 등과 주식회사 형태의 대규모 수전 농장인 만주농업사(滿洲農業社)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같은 대규모 농장 건설계획은 한인들의 생활안정과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한 것이었으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인 사회의 경제적 안정과 기반 형성 노력은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 결성으로 이어졌다. 1927년 4월 1일 지린성 동대문 밖 대동공사에서 발기회를 가진 농민호조사 결성에 가담하였는데, 정의부의 핵심 간부들과 미주에서 활동하던 안창호까지 가담하였다. 추진 과정에서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경찰에 체포되어 20여 일간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농민호조사는 입회금과 연회비를 납부하는 사원으로 조직되어 집단농촌을 경영하는 조합 형태의 단체였다. 최종적으로는 1인당 150원 이상의 출자금으로 대단위 토지를 구입해 출자액 비율로 분배 경영한다는 구상이었다.
1926년 2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이상룡이 면직된 후 후임 국무령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만주지역 동지들의 뜻을 쫒아 국무령 취임을 거절하였고, 4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무령 선임을 취소하였다.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결집을 추진하였다. 당의 지도 아래 무장세력과 자치조직 운영을 계획한 것이다. 천도교측의 최동희와 함께 정의부 인사들, 천도교 혁신파인 천도교연합회 계열, 형평사의 대표들, 그리고 소련지역 무장투쟁 세력들을 규합하는 정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1926년 3월 29일 자신의 집에서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선언과 강령, 당칙을 작성하고 조직부, 선전부, 경리부, 검사부 등의 집행기관을 설치하였다. 1926년 4월 5일 지린(吉林)에서 고려혁명당의 창당이 선포되었는데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설립 초기 간부는 책임비서 이동구, 위원 정이형, 현정경, 오동진, 고활신, 이동락, 김봉국, 최동희, 주진수 등이었다. 성립 이래 무장투쟁 위주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2월말 이동락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조직 전모가 노출됨에 따라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1926년 12월에는 중국 지린성 판스(盤石)에서 정의부, 한족노동당, 남만청년총동맹의 각 간부들과 유지자들이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민족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동지와 가족에게 정신적, 물질적인 동정과 후원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930년경 지린에서 국민부의 김동삼 등과 한족총연합회와의 합동을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1930년 12월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한 다음에도 안창호, 이동녕 등과 국민부와 한족총연합회의 통합을 재차 추진하였다.
1931년 2월에는 김규식, 안창호 등과 우리 동포들의 보르네오 집단 이주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윤봉길의 홍커우공원 투탄의거 이후 은신하다가 1933년 10월 상하이로 귀환하여 임시정부의 재건에 나섰다.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난징(南京), 전장(鎭江) 등을 오가기도 하고 김홍서, 문일민 등을 파견하여 동지들을 재규합하는 데 힘을 다하였다.
1933년 말 그는 일본 주오(中央)대학에 재학 중인 외아들(양효손)에게 수차례 밀서를 보내, 독립운동 투사가 부족하므로 일본에서 인물을 물색하여 상하이로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이로 인해 양효손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3년 12월 30일 전장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정기회의에서 송병조, 윤기섭, 조소앙, 김규식, 최동오, 김철, 성주식, 조성환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34년 1월 20일 전장(鎭江)에서 소집된 제1회 국무회의에서 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고, 같은 해 말에는 군무장도 겸하였다.
또 항저우(杭州)에 한국독립당의 사무소를 마련하고 당의 재건에 힘썼고, 기관지로 『진광(震光)』을 간행하였다. 1935년 5월에는 송병조에 이어 한국독립당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1935년 6월 25일부터 7월 4일까지 난징에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회의에서 신당 창당을 위한 예비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예비회의에서 위원장을 맡아 신당 창당을 위한 준비절차를 이끌었다. 그의 주재 하에 마침내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의열단,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의 5단체와 기타 군소단체 대표자들이 7월 5일 신당 결성식을 거행하고,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다. 민족혁명당의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나, 민족혁명당에 내분이 일자 탈당하여 1937년 4월 하순 지청천 등과 새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고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쑤성(江蘇省) 담양현에 있는 암자(길담암, 吉堂庵)로 은신하였다가, 1938년 4월 19일 서거하였다. 유해는 1998년 국내로 봉환되어 서울 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말 계몽운동에서 시작하여 의열투쟁과 독립군 활동, 독립운동 정당과 임시정부 활동 등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앞장서서 이끈 선도자였다. 만주 망명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과, 만주지역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통한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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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우강 양기탁선생전집편찬위원회 편, 『우강 양기탁전집』, 동방미디어, 2002
- ・ 국가보훈처 편 『쌍공 정이형회고록』, 1995
- ・ 『대한매일신보』
- ・ 정진석,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나남, 1987
- ・ 김필자, 『우강 양기탁의 민족운동』, 지구문화사, 1988
- ・ 채영국, 『한민족의 만주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00
- ・ 한국언론사연구회 편, 『대한매일신보연구』, 커뮤니케이션북스, 2004
- ・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12
- ・ 김성민, 『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까지의 선도자 양기탁』, 독립기념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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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장, 『양기탁의 서간도지역 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6,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