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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정원

플라톤의 유머

극작가 플라톤의 희미한 유머

플라톤의 유머는 은근하고 짓궂고 때로는 아프게 다가온다. 드라마나 소설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플라톤의 글 자체가 단순하지 않아서 다양한 울림의 아이러니를 빚어낸다. 그의 글이 지니고 있는 유머도 그런 아이러니를 통과한 것이기에 복합적인 느낌을 준다. 유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 대목들은 어떻게 보면 플라톤의 의도라기보다는 상황 자체의 산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아이러니의 중심에는 플라톤이 너무나 좋아하는 주인공 소크라테스가 있다.

『향연』의 예를 들어보자. 『향연』은 젊은 비극 시인 아가톤이 경연 대회 우승 기념으로 베푼 잔치판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이 주연에 참석하여 술을 마시다 사랑(혹은 그것의 의인체로서의 에로스)이라는 주제에 대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기로 한다. 그 한 말씀들의 내용이 『향연』의 줄거리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날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방식이다. 『향연』의 화자는 아폴로도로스라는 사람이다. 그 잔치가 벌어진 시점으로부터 오랜 후에 그가 자기 친구에게 잔칫날의 일을 전해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런데 아폴로도로스가 그 자리에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도 그날 있었던 일을 아리스토데모스라는 사람에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아주 오래전에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다시 자기 친구에게 전하고 있는 형식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이야기는 풍성하고 정교한 디테일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아폴로도로스라는 화자를 내세워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소설처럼 서술하고 있는 손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서사의 이면에 꽁꽁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형적인 소설가나 드라마 작가의 방식인 셈인데,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의 글에서 솟아나는 풍부한 아이러니를 확인케 된다.

이 잔치판에서 집주인 아가톤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인물이 사랑에 대해 연설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소설에 언제나 등장하는 주인공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그리스의 대표적인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등장은 이채롭다. 세번째로 연설하는 그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디 두 개체 한 쌍이 한몸으로 되어 있었다(이 ‘한쌍한몸’은 세 종류가 있었다. 태양에서 생겨난 남남, 달에서 생겨난 여남, 그리고 대지에서 태어난 여여). 머리가 둘, 팔과 다리가 각각 넷, 그래서 지적인 능력도 힘도 현재의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났다.

이 때문에 신들이 위협감을 느꼈고 마침내는 사람들을 삶은 계란 쪼개듯 두 동강을 내버렸다. 그것이 지금의 인간이고, 둘로 자른 자리를 말끔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배꼽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요컨대 둘로 쪼개지면서 잃어버린 예전의 자기 짝을 향한 갈망이며 재결합과 완전성에 대한 욕망이자 추구라는 이야기이다.

『향연』에서 절정의 자리에 있는 것은 물론 마지막 연사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 예찬이다. 플라톤이 가장 힘주어 기술하고 있는 대목이지만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에 비하면 길고 지루하다. 그런데 그 속에 작은 칼날이 숨겨져 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의 요체인즉, 에로스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감각에 포착되는 헛된 것들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아름다움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보물을 포착하게 인도해주는 가장 큰 힘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를 디오티마라는 부인에게 들은 것이라면서 늘어놓는데 그의 이야기 중간에, 위에서 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를 대놓고 비판하는 대목이 자리잡고 있다.

자기 반쪽을 찾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이 안 된다는 것, 인간이란 자기에게 유해하다면 자기 손발도 잘라버릴 수 있는 존재인데 어떻게 자기 반쪽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찾아 헤매는 일이 가능하겠냐는 내용이, 디오티마의 이야기라며 소크라테스의 연설 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당연히 맞는 이야기지만 웃자고 한 이야기에 정색하고 덤벼드는 꼴이기도 하다.

게다가 아리스토파네스도 같이 먹고 마시는 자리인데 면전에서 이렇게 대놓고 비판을 하고 있는 모양새는 좀 이상해 보인다. 중인환시리에 이런 비판에 직면한 아리스토파네스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가만히 있으면 비판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반론을 하거나 아니면 웃으면서 받아들이거나, 어떻든 뭔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잔치판이 벌어졌을 때 소크라테스는 오십대 중반이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그보다 스무 살쯤 아래였다.

그런데 플라톤은 독특한 방식으로 이후의 일을 처리한다. 소크라테스의 연설이 끝났을 때 좌중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일었다. 당연히 아리스토파네스는 예외였다. 반박할 차례가 된 그가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담장 밖에서부터 시작된 주정뱅이들의 소동과 뒤이어지는 야단법석으로 인해(그들은 모두 소크라테스를 추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발언권은 슬그머니 묻혀버린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다. 그들은 그냥 소크라테스를 둘러싸고 술을 마셨고,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사양하지는 않고 또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는 최고의 술꾼 소크라테스가 취한 사람들의 뒷정리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그러니까 플라톤은 매우 새침한 방식으로 아리스토파네스의 반론권을 빼앗아버린 셈이다. 물론 이유가 없을 수 없다. 『향연』에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사기꾼 소피스트로 묘사한 풍자희극 『구름』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플라톤에게 아리스토파네스는, 자기가 존경하는 스승을 사기꾼 소피스트로 우스꽝스럽게 그려낸 악당인 데다 위대한 존재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한심한 인물이기도 한 셈이다. 말하자면 『향연』을 쓰고 있는 플라톤은 지금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인가.

만약 플라톤이 아리스토파네스처럼 마음껏 허구를 동원할 수 있었던 진짜 현직 극작가였다면 스승에 대한 복수가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향연』의 잔치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본래 연설 순서는 두번째였다. 그런데 뭘 잘못 먹은 탓인지 갑작스러운 딸꾹질 때문에 자기 말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고 플라톤은 썼다. 반론권 묵살과 딸꾹질시키기 정도가 플라톤의 소심한 복수였던 셈이니 새침하고 귀여운 감각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이런 식의 유머 감각은 그의 책에서 이따금씩 모습을 보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글을 쓴 사람이 플라톤임을 감안할 때, 플라톤이 쓴 글의 디에게시스적 측면(이 책의 10장을 참조하라)을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포착될 수 있는 형태의 유머이다. 그의 첫 저작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예를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는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명으로 기소되어 법정에 섰다. 그런 혐의라면 국가 반역죄나 대역죄 같은 것에 해당되는 중죄일 것이다. 어차피 그런 죄들은 실체 없는 것이기 쉬워서 그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는 이 죄명으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당시 아테네 법정은 500명의 판관들이 투표를 통해 유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했다. 소크라테스는 판관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자기 변론을 했고 투표 결과 280대 220, 60표 차이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제도에 따르면 또 한차례 형량을 정하는 두번째 투표가 행해진다.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측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이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소액의 벌금형을 제시했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2차 투표가 뒤이어진다. 투표에 앞서 또다시 소크라테스는 자기 변론을 했고, 500명의 판관이 두번째 투표를 했다. 결과는 360대 140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사형 판결이 났다. 이것은 1차 때보다 160표가 더 벌어진 결과이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하면 할수록 불리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 책에는 좀처럼 등장하는 법이 없는 플라톤이 엑스트라처럼 등장한다.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자기는 가난해서 돈이 없다며 벌금형으로 ‘은 1므나’를 제시했고 잠시 후, 자기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생겼다며 벌금을 재차 ‘은 30므나’로 올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벌금의 보증인으로 등장하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이 플라톤이다. 법정에서 행해진 소크라테스의 이런 언행은 그를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있었겠으나 판관들의 표를 얻게 하지는 못했다. 벌금의 액수 문제로 저런 식의 논란을 하는 것 자체가 판관들의 마음을 심하게 긁어대는 일이기에, 소크라테스가 일부러 사형 판결을 유도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게다가 그는 사형 판결이 난 다음에는 자기에게 그런 판결을 내린 판관들을 향해 저주의 거친 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소크라테스의 모습, 오만하고 공개적으로 잘난 척하여 말을 할수록 표를 잃는 사람, 게다가 판관들의 염장을 질러대는 언행을 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 아닌가. 그 자신이 끔찍하게 존경했던 스승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이렇게 묘파해내는 플라톤의 모습은,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어떠했는가를 떠나서 그 자체가 아이러니로 가득찬 유머 감각으로 다가온다.

플라톤의 지독한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죽던 날의 풍경을 다룬 텍스트 『파이돈』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는 한 달 정도의 유예기간이 있었다. 이 사이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일흔이었고 플라톤은 스물여덟이었다. 그들의 나이만큼이나 삶과 죽음에 대한 느낌도 달랐을 것이다. 마침내 사형 집행날이 되어 소크라테스의 친구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하는 소크라테스적 명랑성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감싸안아버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이는 기묘한 풍경이 연출된다.

그 속에서 그들은 영혼의 불멸에 대해 평소처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다. 독이 서서히 몸에 퍼져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최후의 농담을 한다. 의약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 빚졌으니 갚아달라는 말을 친구 크리톤에게 남긴다. 이제 육신을 벗어버리니 병이 없을 것이고, 그것에 대한 감사의 제물로 의약의 신에게 닭을 바쳐달라는 뜻이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풍의 유머라면 플라톤의 유머 감각은 이 글의 초두에서 발휘된다. 『파이돈』은 최후의 날 풍경을 파이돈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 에케크라테스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이돈은 텍스트의 초두에서 그날 모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으면서 마지막으로 플라톤의 이름을 거명한다. 플라톤은 그날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었다고.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 스승의 비극적 최후를 지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크라테스의 최고 제자 플라톤의 경우이다. 죽을병이 아닌 다음에야 그 자리는 지켜야 했던 것이 아닌가. 공자의 제자 자공은 자연사한 스승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스승의 묘에서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고 그 흔적이 지금도 공자의 묘 앞에 남겨져 있다. 스승에게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제자였음에도 그랬다. 두 사람의 죽음 모두 기원전 5세기 무렵이니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다. 그리스와 중국의 풍속이 다른 탓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스승의 임종을 지키는 일이라면 그 뜻에 있어서는 동양이건 서양이건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부재를 기록하고 있는 손의 주인이 누구인가. 이제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플라톤 자신이 아닌가. 넣지 않아도 상관없는 문장이었을 텐데, 그 문장을 꼭 넣었어야 했을까. 왜 넣었을까. 병이 사실이었다면 대체 무슨 병이었기에 예정된 스승의 임종도 못 지켰다는 것인가. 나이든 플라톤이 한 자 한 자 채워넣었을 그 문장 하나로 인해 텍스트의 표면에는 심상찮은 아이러니의 공간이 생겨난다. 그것도 플라톤의 유머 감각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 저 위의 귀여운 유머에 짝이 되는, 씁쓸하고 기이해 보이기도 해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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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출처

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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