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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틀래치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등가교환을 축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우리 삶의 전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등가교환의 원리는 식당에서의 개별 계산처럼 합리적이고 쾌적하고 위생적인 원리이다. 돈이 있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은 그것 자체 이외의 어떤 정신적 에너지도 필요치 않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거나 받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요구한다. 무엇을 선물해야 할까,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혹시 뇌물로 보이면 어떡하나. 내가 받은 이 선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걸 받아도 되나, 이 마음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등등.
살다보면 뜻하지 않는 선물을 받기도 하고,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신세를 지기도 한다. 그런 것이 우리 삶이다. 우리의 의지나 기획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기도 하고, 공평함이나 인과응보와는 다르게 귀결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실상이다. 삶이 지닌 그런 울퉁불퉁한 단면들을 매끄럽게 절삭해놓은 것이 곧 교환의 질서이다.
이같이 매끄러운 교환의 질서로부터 가장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이 순수 증여이다. 그것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비판했던 자크 데리다에게서 빌려와 나카자와 신이치(中澤新一)가 재조립해낸 개념이다. 말 그대로 어떤 답례도 불가능한 증여, 대가의 개념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절대적 증여를 순수 증여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익명의 기부나 희사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순수 증여인 것은 어디까지나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섰을 때이다. 고마운 마음을 전달할 길이 없기에 말이다.
하지만 기부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익명의 기부자는 말하자면 자신의 재물을 천국에 쌓은 것이 아닌가. 그가 느낄 뿌듯함이나 모종의 불편함 같은 것은 순수 증여의 대가일 것이다. 그래서 순수 증여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만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이나, 그 한복판에 유추의 모체로 존재하고 있는 부모의 사랑 같은 것도 순수 증여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나, 그것들도 역시 신이나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 자식들의 입장에서 성립된 개념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순수 증여의 가장 뚜렷한 상징은, 무엇보다도 태양이 아닐 수 없다. 태양계에 사는 모든 생명체들에 관한 한, 태양은 모든 에너지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원천이다. 그 에너지는 무제한적이고 일방적이다. 우리가 태양에 감사한다 한들 그 감사를 전달하거나 실현할 길이 없다. 태양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가 발하는 에너지는 대가 없는 것이며 보답받을 수 없는 것이기에, 엄청난 규모의 지속적인 포틀래치이며 보상 없는 낭비이자 사치이고 또 절대적 증여에 해당할 것이다.
지구상에 사는 생명들의 세계에서 보자면 태양의 에너지는 언제나 차고 넘친다. 그 자체로 과잉과 잉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자기가 확보한 에너지를 성장(생존)과 번식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쓰거니와, 생명체들이 이를 위해 확보하고자 하는 에너지도 언제나 잉여를 향해 나아간다. 필요보다 많은 양을 축적하고자 하는 경향은 단지 사람들의 뱃살이나 내장 지방의 경우만은 아니다. 문제는 지속적으로 축적되는 이 잉여 에너지가 어떻게 처분되는가 하는 것이다.
개체의 성장과 유지와 증식 같은 생명의 목적 바깥에 있는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건 낭비되거나 폐기될 수밖에 없다.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잉여 에너지, 결국 파국적으로 소비될 수밖에 없는 힘을,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저주의 몫’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비합리적이고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끔씩 어이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한 한, 한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목숨건 싸움을 하기도 하고 미친 듯 열광하기도 한다. 크게는 인류가 벌인 대형 전쟁들과 대학살의 참상들이 그렇고, 스포츠에 관한 대중적 열정들이나 좀더 작게는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의 게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해 평생 원수로 지낸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저주의 몫’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좋겠다. 한발 더 나아가 바이러스 같은 생명체의 시각으로 보자면 어떨까. 인간이라는 지나치게 고등하고 정교한 유기체의 존재 자체가 우주의 사치이자 저주의 몫이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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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출처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