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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정원

증여와 교환

증여의 질서

옛날 어느 나라에 장군이 있었다.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능력 있는 장군이었다. 전쟁터에서 휘하의 군사들을 점검하다가 등창이 나서 고생하는 한 병사를 보았다. 장군은 그 병사의 종기에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냈다. 종기로 고생하던 병사는 물론 그 장면을 지켜본 모든 군사들이 장군의 태도에 감동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그 병사의 어머니는 슬퍼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묻자 그 어머니는 말했다. 장차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게 될 텐데,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 병사의 어머니는, 교환의 질서와 구분되는 증여의 질서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말뜻 그대로 보자면 교환은 주고받는 것이고, 증여는 그냥 주는 것이다. 교환의 질서가 현재 우리 삶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점에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으뜸가는 원리가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증여의 질서란 무엇인가. 단지 주기만 하는 것인가. 일단 간 것이 있는데 오는 것이 없기는 어렵다. 위의 예에서처럼 장군은 단지 자기 휘하 병사의 병을 걱정했을 뿐이지만 그 행위는 다른 형태로 보답받는다. 자기를 배려하고 인정해준 장군에게 병사가 돌려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목숨건 충성일 것이다. 어머니가 슬퍼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내게 주어진 신뢰와 사랑이라는 무형의 선물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교환이나 증여는 모두 주고받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둘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최소한 세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교환과 달리 증여는 계량 가능한 물질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교환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의 매매를 기본 모형으로 한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 상품과 화폐가 오간다. 계산은 정확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영수증이 발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증여는 계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교환과 다르다. 물론 물질적인 것이 개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물질은 상품이 아니라 선물의 형태를 지닌다. 상품과는 달리 선물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다른 어떤 것, 사랑이나 애호나 배려 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선물이 오가는 곳에서는 교환가치나 상품의 지위를 환기시키는 요소들, 영수증이나 가격표 같은 것들은 깨끗하게 제거되어야 한다. 그런 냄새가 나지 않을수록 좋은 선물이다.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처럼 값이 없거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할머니의 반지처럼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물건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선물로서는 최상급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선물의 값이 문제가 되는 관계라면 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를 하고 있는 중이다.

둘째, 교환에서는 주고받는 일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선물을 둘러싼 증여와 답례는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래서 증여는 ‘지연된 교환’이다. 선물을 받았다고 바로 다음날 같은 값의 다른 물건으로 답례한다면 어떻게 되나.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받는 일이 부담스럽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것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그들이 친구 사이였다면 앞으로 만나지 말자는 표현이 될 것이다. 물론 가장 좋은 절교의 수단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혹은 상대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교환은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하는 일처럼 받은 것과 정확하게 같은 것을 돌려주는 것을 최선으로 삼지만, 선물에 대한 답례는 받은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을 매우 다른 방식으로 돌려주는 것이 최선이다. 진짜 선물이라면 끝까지 아무런 답례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받은 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기에, 그것은 돌려주기보다는 자기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교환과는 달리 증여에는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는다. 교환은 그것이 자유로운 등가교환이라면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최선이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만족하는 거래가 최선인 것이다. 그러나 증여에는 이해관계라는 개념 자체가 아예 개입하지 않는다. 이익이나 대가가 개입한다면 선물은 뇌물이 된다. 병사의 종기를 빨아준 장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순수하게 병사를 걱정하는 마음이었다면 그는 증여의 질서 속에 있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전투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는 이미 교환의 세계에 있다.

슬퍼한 병사의 어머니는 이 장군의 행동 속에 있는 교환자의 마음을 읽었는지도 모른다. 병사의 운명에 관한 이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을 수 있지만 표준적인 것은 장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자기에 대한 배려와 신뢰로 해석된 장군의 행동에 대해 목숨으로 갚은 병사만이 증여의 질서 속에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증여의 논리는, 등가교환을 핵심으로 하는 교환의 세계의 외부자이다. 이런 점에서 증여는 자본주의 생활 질서와는 다른 어떤 것, 그 이전이거나 이후거나 그 위에 있거나 아래에 있는 어떤 것이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증여론』(1925)을 통해서, 다양한 인류학적 자료들을 통해 이 같은 증여의 질서에 대해 논증하고, 이것이 좀더 일반적인 차원의 논리로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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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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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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