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절대적 규범의 사라짐을 배경으로 하는 근대의 윤리는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의해 규정된다. 인간인 이상 누구나 실수나 잘못을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윤리성은 그가 한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자기 행위에 대한 태도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그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행위와 사태에 대한 책임의 형식에서이다.
이를테면 유럽의 다양한 서사문학에 등장하는 유명한 악당 돈 후안이 있다. 그는 못된 짓을 하다가 결국 천벌을 받을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 참회하고 지옥행을 면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문제는 참회이되 중요한 것은 그 참회의 진정성이다. 냉큼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한쪽 극단에 있다면, 다른 쪽 극단에는 끝까지 신에게 맞서며 자발적으로 지옥행을 선택하는 행동이 있겠다. 그 중간쯤 어딘가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면서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지옥행을 선택하겠다는 태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진정한 참회이며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방식인가. 쉽게 답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신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처벌이 무서워 냉큼 회개하는 것이 윤리적이지 않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뉘우침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향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국민들의 죄와 책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 ‘형이상학적 책임’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죄와 책임에 관한 한, 논리 수준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야스퍼스 자신은 히틀러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한 바 있는, 나치 협력에 관해서는 결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 가지 태도를 경계하고자 했다. 패전국의 곤란을 모면하기 위해 입으로만 행하는 사과 및 독일 국민 전체가 전범 취급당하거나 스스로를 전범화하는 태도가 그것이었다. 그는 가담한 정도에 따라 죄와 책임이 나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치 치하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네 가지로 구분했다. 책임의 궁극적 형태를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책임은 그 네번째 항목으로 등장한다.
첫째는 법적 책임. 이 경우 법적 책임은 전쟁에 관한 국제법과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자연법에 입각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실정법을 지켰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모든 독재자들은 법을 만들어서 ‘합법적’으로 통치한다. 문제는 그 법이 자연법의 정신에 어긋나는 이상한 법이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법정에서 해결된다.
둘째는 정치적 책임. 여기에서 정치적 책임이란 자기가 나치 정권의 집권에 반대표를 던졌다고 해서 모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반대자이건 기권자이건 간에 합법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권 아래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한 사람이라면 그 정권이 져야 하는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도의적 책임. 이것은 자신의 양심의 법정에서 행해지는 판결이다. 나쁜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동조했다거나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불가피한 명령 등으로 인해 나쁜 일에 손을 담근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물론 이것은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으며 해당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로 형이상학적 책임(죄)이 등장한다. 나쁜 일이 행해지는 자리에 있었거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그 일에 가담한 적이 없고, 마음속으로 동조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피해자가 될 뻔한 위치에 있었다. 요행히 그는 나쁜 일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끔찍한 순간이 지나고 난 후 운좋게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죄책감, 곧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 죄의식이라고 했다. 이런 경우는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살아나온 유대인들에게서 대표적으로 드러났고, 또한 우리의 경우로 보자면 1980년 5월 광주를 산 채로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처참했던 죄의식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겠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잘못이 있다면 무고한 죽음 앞에서 대신 죽지 못한 죄가 있을 뿐이다. 형이상학적 책임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책임 윤리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출처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