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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화 혹은 문명의 발생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리는 ‘억압 가설’이라는 말로 지칭되곤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문명의 발생은 인간의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는 다양한 충동에 대한 통제와 억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충동에 몸을 맡겨버린다면 우리가 문화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질서도 공동의 결사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문명의 발생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본능적 충동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의 금지에서 족외혼으로 이어지는 흐름 같은 것이 그 첫걸음일 것이라 했다. 이런 논리는 문명화의 정도가 인간의 내적 충동에 대한 억압의 강도와 정교함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는 수준까지 나갈 수도 있다.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억압 가설을 바탕으로 새롭게 문제를 제기한다. 억압 없는 문명은 불가능한 것인가. 물론 이 물음은 프로이트 자신에 의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마르쿠제는 파시즘의 발호와 제2차세계대전의 대량 살육이라는 현상을 목격했고, 지배 질서와 사회적 억압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억압이 문명 발생과 유지를 위해 필연적인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저항의 논리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이런 논리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마르쿠제가 고안한 것이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이라는 개념이다.
그는 억압을 기본억압과 과잉억압의 두 종류로 구분했다. 기본억압은 사람이 짐승과 구분되는 최소한의 필요조건으로서 충동의 억압을 뜻한다. 근친상간의 금지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에 비해 과잉억압이란 특정한 시대의 사회체제가 질서 유지를 위해 구성원들에게 부여하는 억압이다. 이를테면 역사적으로 특수한 가족제의 형태와 같은 것, 가부장제나 일부일처제 같은 것이 그런 것이다. 또 실행원칙이란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현실원칙의 역사적 형태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본연의 힘을 쾌락원칙이라 했고, 그것을 통제하여 공동생활을 가능케 하는 힘을 현실원칙이라 했다. 현실원칙이 인간의 문명을 가능케 한 기본억압을 수행하는 힘이라면, 마르쿠제가 개념화한 실행원칙은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단계가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과잉억압을 수행하는 힘인 셈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억압과 현실원칙으로부터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이 구분되면, 프로이트의 억압 가설은 다치게 하지 않은 채로 현행 지배 질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 논리적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억압은 인류 문명 발생의 정신적 기축이므로 그것 자체에 대한 부정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합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에 대한 저항이라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논리적으로 정당하다. 과잉억압과 실행원칙이라는 개념쌍은 이처럼 프로이트적인 기반 위에서 현실에 대한 저항 논리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안출되었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억압 없는 문명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억압과 그것에 대한 저항의 논리 너머에 있는 것이 비억압적인 승화의 영역이고, 마르쿠제는 그 가능성을 예술적 상상력과 유희의 세계 속에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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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출처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