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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문학 개념
정원

선험적 가상으로서의 물신주의적 오인

무의식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살다보면 더러는 쓰지 않는 값비싼 물건을 버리기도 하지만 돈은 다르다. 아무리 작은 돈이라도 돈을 버리기는 힘들다. 다른 물건은 쓰면 중고가 되고 자연스럽게 값이 떨어지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낡은 돈이라도 돈은 여전히 표면에 새겨져 있는 가치를 지닌다. 그저 금속조각이나 작은 종이에 불과한 것인데도 돈은 특별한 물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돈을 버리는 것은 흡사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돈이란 교환의 편리를 위해 한 사회가 만들어낸 약속의 산물일 뿐이다. 한 사람이 무인도에 표류했다 치자. 물건을 살 곳도 은행도 없다. 그러면 만원짜리가 아니라 백만원짜리 수표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백만원짜리 수표는 그저 그 크기만큼 종잇조각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불쏘시개를 하거나, 메모지 또는 화장실 휴지로 쓰거나. 이처럼 한 개인의 상황이나 취향에 따라 사물이 지닐 수 있는 특수하고 다양한 쓰임새를 그 물건의 사용가치라고 한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사람에 따라 사용가치는 천양지차일 수 있다. 백만원짜리 수표의 사용가치는 무엇인가? 대답은 불쏘시개, 휴지, 메모지, 편지지 등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물건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교환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며 이를 교환가치라고 한다(우리가 말하는 물건의 가치는 바로 이 교환가치를 뜻한다). 그리고 그 돈은 그 교환을 위해 사회적으로 확립된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도 돈이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청소하다가 나온 백원짜리 동전 하나도 쉽게 버릴 수 없는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경영자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백원짜리 동전을 버리는 일은 단지 작은 금속조각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백원이 지닌 가능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백원의 가능성? 이를테면 동전 두 개를 모아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아빠에게 드렸더니 기특한 딸이라고 특별 용돈 만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어찌어찌하여 십만원을 만들고, 또 그 돈으로 어찌어찌 투자를 잘하여 백만원을 만들고, 또 어찌어찌하여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천만원의 종잣돈을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 속에서 백원짜리 동전 하나는 단지 금속조각 하나가 아니라 수억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마술적이고 신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를 어떻게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미래와 동의어가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돈이 지니고 있는 마력적인 외관일 뿐이다. 이를테면 못 쓰게 된 다리미, 그래도 고물상에 가져가면 백원은 받을 수 있는 다리미가 있다 치자. 이것은 어떤가. 물론 백원의 가능성이라는 점에서는 이 다리미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고장난 다리미와 백원짜리 동전이 지니고 있는 느낌이나 외관은 매우 다르다. 고물은 고물이고 돈은 아! 돈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다를 게 없는데도, 돈은 그와 같은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물건과는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로 이런 느낌으로 돈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마르크스는 물신주의(fetishism)라는 말을 썼다. 물신주의라는 말은 당초 원시적인 종교에서 바위나 강이나 산 같은, 마음이 없는 대상을 마치 마음이 있는 대상인 양 숭배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은 바로 이러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인도에 가면 종잇조각이나 금속조각에 불과한 것인데, 사회 속에 들어오면 성스러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돈을 성스럽게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는 자명하다.

사람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사회라는 실체가 곧 그것이다. 이를테면 왕과 신하의 관계가 있다. 왕이 왕인 것은 신하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고 군신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들은 거꾸로 왕이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신하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왕의 지위를 만들어주는 것은 왕과 신하가 맺고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의 효과이다.

그러나 그 관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거꾸로 보인다. 왕이 있어 나라가 있고 신하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돈은 사회 구성원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것이 돈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돈이다. 하지만 우리가 돈을 볼 때는 그 사실은 보이지 않고 돈은 단지 돈이기 때문에 숭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착각을 물신주의적 오인이라고 한다. 즉 어떤 대상이 지니고 있는 반영적 규정(reflexive determination)을 자연적 속성(natural attribute)으로 착각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오인이라는 말을 썼는가. 오인이라는 말은 상상계의 정신적 메커니즘을 지칭하면서 정신분석학자 라캉이 썼던 말이다(상상계・상징계・실재계 참고).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처럼 만들어진 말이기도 하다. 프랑스어로 오인은 méconnaissance라고 쓴다. 라캉은 이 말을, ‘나를’을 뜻하는 me와 인식이나 의식을 뜻하는 connaissance로 분리시킨다. 즉 두 마디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자기의식이고 하나로 합해져 있으면 오인인 셈이다. 이런 조작을 통해 라캉은 자기의식을 뜻하는 므-코네상스(me-connaissance)는 결국 착각이나 오인에 불과한 것, 곧 메코네상스(méconnaissance)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 Selbstbewußtsein)이란 헤겔 철학에서 맹활약했던 유서 깊은 용어이다. 세상을 보는 단순한 의식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고 바야흐로 이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말하자면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계기에 해당하는 개념이 헤겔의 자기의식이다. 라캉은 그런 뜻을 지닌 자기의식이라는 말을 프랑스어 특유의 말놀이를 통해 오인이라는 말과 연결시켰다. 자기를 아는 것이란 곧 착각에 불과한 것, 자기를 잘못 아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라캉의 이런 조작이 단순한 말장난이 아닌 까닭은, 그런 오인의 구조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접어드는 단계, 곧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던 아이가 말을 배우고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단계, 즉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단계(이 단계가 시작하는 지점을 라캉은 거울단계라고 부른다)의 핵심적인 기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착각의 효과는 말을 배우고 난 다음 단계인 상징계로 접어들면서도 여전히 유지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울을 보면서, 혹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 속에서 자기 모습을 확인하면서. 하지만 그것이 착각에 불과한 것이며 자기가 정말 어떤 존재인지는 영영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오인’이라는 말 속에 내재해 있다.

따져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란 현재의 내 의식 속에 떠올라 있는 어떤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씩 내가 전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혹은 꿈속에서. 어떤 것이, 어디까지가 진짜 나인지는 확정하여 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를 그냥 나라고 생각하며 산다. 그렇게 행동하고 사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행동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인’의 구조는 한 공동체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고 그 집단의 일원으로 사는 데 불가피한 셈이다.

이처럼 우리 인식의 구조에 토대해 있는 불가피한 착각을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선험적 가상이라고 불렀다. 가상(Schein)이라는 말은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말이고, 선험적(transcendental, 이 말은 번역자에 따라 초월적, 초월론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라는 말은 우리 경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우리 경험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칸트는 이 말을 경험적 가상 및 논리적 가상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썼다.

경험적 가상이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곤 하는 순간적인 착시와 같은 것들이고, 논리적 가상은 잘못된 추론을 통해 도달한 잘못된 결론 같은 것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 이야기’ 같은 논리적 궤변이 그런 것이다. 이 둘은 어렵지 않게 제거될 수 있다. 경험적 가상은 대상을 제대로 다시 한번 들여다봄으로써, 또 논리적 가상은 잘못된 추론 과정을 밝힘으로써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험적 가상은 인간의 감각과 인식의 구조 속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환상이다. 칸트는 달이 지평선에서 솟아오를 때가 하늘 복판에 떠 있을 때보다 더 커보이는 것 등의 예를 들었다. 물이 차 있는 유리잔 속의 젓가락처럼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구부러져 보이는 것(가상)이 선험적 가상이다. 말하자면 선험적 가상은 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각기관의 구조로 인해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적 착오라는 뜻이다.

라캉이 사용하는 ‘오인’이라는 말도 칸트의 선험적 가상과 정확하게 같은 차원에 있다. 마르크스가 사용했던 물신주의도 마찬가지다. 물론 세 사람이 그런 개념을 사용하게 된 맥락은 각각 다르다. 칸트는 순수이성이라는 인간의 인식을 문제삼았고, 라캉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지니고 있는 근본 구조였으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화폐와 상품이 지니고 있는 효과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회구조의 차원에 존재하는 물신주의라는 말은 인간의 정신구조의 차원에 존재하는 ‘오인’이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유착할 수 있다. 화폐(상품) 물신주의도, 자기 자신에 대한 ‘오인’도 근본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그런 ‘오인’의 구조가 당연한 것인 양 사고하고 행동한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돈은 돈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처럼. 그런 한에서 ‘오인’의 구조는 우리 삶에 필연적이고, 그런 필연성을 우리는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물신주의적 ‘오인’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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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채 집필자 소개

1961년 목포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문학과 이론을 가르치고,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의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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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개념정원
인문학 개념정원 | 저자서영채 | cp명문학동네 도서 소개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아는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한번쯤 들어보거나 읽어본 개념어는 많은데 그 개념의 어원이나 구체적 쓰임 같은 맥락에 어두웠던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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