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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는 지난
100년동
안 어...

아리랑에서 파업전야까지

문화도 상품이다

목차

  1. 근대가 낳은 자식
  2. 연쇄극을 거쳐 극영화로
  3. 아리랑으로 불붙은 영화 붐
  4. 전후의 부흥
  5. 되살아나는 영화정신

근대가 낳은 자식

영화평론가 김소영은 “영화 공부를 통해 영화를 잉태하고 성장시킨 현대의 한 특정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고, 역으로 모더니티를 이해하면 영화라는 매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 열화당, 1996년)이라고 말한다. 근대의 자식인 영화는 그 모태인 근대사회를 반영하면서 동시에 그것 자체를 형성시킨 중대한 매개체였다.

서구에서는 1895년을 영화 탄생의 해로 친다. 영사기와 필름을 둘러싼 오랜 발명의 역사 끝에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찍은 짤막한 필름을 대중 앞에서 유료로 상영한 것이 바로 이 해였다. 우리나라에 영화가 처음 소개된 것은 1899년으로,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스가 영사기와 ‘활동사진’을 들고 와서 고종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상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3년경에는 서울 장안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설 유료상영이 이루어졌으니, 이 신기한 마술장치가 서구로부터 한국에 도달하고 뿌리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셈이다.

영화와 한국인의 만남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황성신문』 1901년 9월 14일자는 “이와 같이 귀신의 조화 속 같은 물건은 천고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니 우리나라 사람은 어느 때에나 이런 묘술을 배워 익힐지 모르겠다”라고 적고 있다. 초창기 영화 흥행업은 미국이나 프랑스의 사업가들이 주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미연초회사인데, 이들은 담배 판촉사업의 일환으로 자기 회사에서 판매하는 담배의 빈 갑을 열 개 혹은 스무 개씩 가져오면 관람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입장시키곤 했다.

활동사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자못 열광적이었고, 개화 지식인들 역시 영화를 열렬히 지지했다. 영화가 대중을 교육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 영화는 서구가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동시에 식민지적 근대를 형성시키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화가 ‘귀신의 조화 속 같은’ 서양 근대의 얼굴처럼 받아들여졌다. 한국의 근대문화는 흔히 전통적인 요소가 잔존하면서 동시에 일본 · 미국 · 유럽적인 요소가 여러 층으로 뒤섞인 혼합물이라고 칭해진다. 그 흔적은 시대를 따라 영화 속에 고스란히 아로새겨져 있다.

영화가 이 땅에 도입된 이래 오늘날까지 미국영화의 지배적 위치는 흔들린 적이 없었다. 이구영은 20세기 초반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외국영화가 아니면 의지 못하는 것이 조선영화계의 십여 년 이래의 상황이다. ······ 수입별로 보면 미국영화가 구십퍼센트로 구주(歐洲)영화 일할에 비교해보면 십팔 배가 좀 넘친다. ······ 미국영화의 세력은 어느 때든지 변함이 없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2일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영화가 한국사회의 대변동기에 끼친 문화적 영향이다. 당시의 논객 박광균에 따르면, 그것들은 “태반이 음탕스러운 놀이와 춤, 포옹과 키스, 화려한 도시, 진주 목두리, 으리으리한 저택 등 부르주아의 향락을 위한 장난감”이었다. 그가 언급한 영화의 특징은 바로 미국식 자본주의 사회의 외양과 풍습에 관한 것이다. 이런 영화들이 경성을 비롯해 전국에 흘러 넘치고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전통적인 연희나 오락수단을 대신하는 흥행산업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미국식 자본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으려면 20세기 초반, 영화가 이 땅에 상륙한 때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초기 영화사를 연구하는 것은, 전통시대로부터 자본주의로 급속히 이행하던 시기의 문화적 정황과 문화산업의 형성과정을 밝히는 핵심 작업이 되는 셈이다.

연쇄극을 거쳐 극영화로

어떠한 자생적 뿌리도 없이 철저하게 수입 문화, 수입 산업으로 시작된 영화가 한국 땅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또한 여기에는 과도기가 필요했다. ‘연쇄극’이 그것인데, 무대에서 연극을 상연하는 도중에 실제 공연이 어려운 장면이나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만들어 중간에 끼워 넣는 형식이다.

최초의 연쇄극은 1919년에 만들어진 「의리적 구토」였다.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오륙천원의 돈을 들여 명월관, 청량리, 홍릉 부근, 장충단, 한강철교 등 당시 서울 장안의 신흥 명소들을 찍게 한 후 단성사에서 상연하는 연극의 중간중간에 삽입해 넣었다.

오늘날 이 「의리적 구토」를 한국영화사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국사람이 처음으로 행한 필름 작업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한국에 영화가 처음 도입되어 우리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초창기 20년의 역사를 시야에서 배제해버리는 문제점이 있다. 어차피 외래문물로서 시작된 것이라면 한국에 처음 소개된 시점부터 연속선상에 두고 영화와 우리 사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연쇄극 시대를 마감하고 본격적인 극영화 제작시대를 연 것은 1923년에 나온 「국경」이다. 이 영화는 남녀평등권을 앞세우는 신여성이 방안에 ‘국경’을 둔 듯이 아내의 도리를 소홀히 하자 남편이 친구의 도움을 받아 아내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는 줄거리이다.

가정 · 여성 · 사랑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영화의 중요한 소재인데, 그 당시 영화들은 이런 소재를 신파조로 엮어낸 것이 대부분이었다. ‘신파’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뉘앙스 그대로, 통속적인 스토리와 유형화된 인물이 등장하는 감정 과잉의 연극이나 영화를 지칭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애정 문제의 이면에는 당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대중들이 느끼던 가치관이나 정서적 혼란이 담겨 있다.

「장한몽」은 몇 번이나 거듭 만들어진 대표적인 신파영화로, 돈이냐 사랑이냐라는 질문을 던져놓은 다음 진정한 애정과 자아에 눈떠가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까페’와 ‘꼴프장’ ‘딴스장’ 등 당시에 새롭게 형성된 서구적 도시공간을 배회하며 그들이 직면하게 된 새로운 남녀관계 · 가족관계 등에 대해 고민한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근대화, 서구화, 도시화에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그 힘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신파극의 주인공들에 대해 당시 관객들은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공감하였다.

가정 · 여성 · 사랑과 같은 문제는 전통시대의 지배층이 정교한 담론을 통해 체제 유지의 중요한 축으로 활용했던 영역이다. 그런데 영화라는 뜻밖의 매체가 한 시대를 장악해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거세게 도전하면서 그것이 떠받치고 있던 봉건시대의 사회 · 문화 전체를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놓은 셈이다. 지배층 엘리트들이 신파극에 대해 두려움 섞인 경멸을 연신 쏟아 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영화를 비평할 때 상업영화 · 예술영화라는 식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대중영화를 새로운 시선으로 읽는다면 이들 상업적인 장르영화 속에서도 전복적인 힘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리랑으로 불붙은 영화 붐

본격적인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나운규와 함께 열렸다. 1924년 부산에서 한국인 최초의 영화제작사인 조선키네마가 설립되었는데 나운규는 여기서 만든 「운영전」에 단역으로 등장하면서 처음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가 2년 후에 발표한 「아리랑」은 최초의 대형 흥행작이자 문제작으로, 한국 무성영화 전성시대는 나운규와 함께 시작되어 1937년 그가 타계함으로써 막을 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랑」의 나운규

나운규의 등장으로 한국영화는 제1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국 무성영화의 전성시대는 나운규와 함께 시작되어 1937년 그가 타계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역사비평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시기에 「아리랑」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고양, 일제가 유화정치를 펼치는 사회적 정세와 함께 영화계 내적으로 한국영화가 잇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공급 부족까지 야기되는 호황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한국영화는 거의 다 고대전설이나 문예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졌던 데 비해, 「아리랑」은 지주 · 마름 · 소작인 · 일제의 하수인 · 지식인 그리고 가난과 성적 희롱에 희생당하는 여성 등 철저히 조선의 현실에 기반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주인공 영진은 전문학교를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철학을 공부하다가 미쳐버린 지식인 청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현실에 대해 마음 놓고 조롱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화는 당시의 현실이 미쳐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리랑」은 당시 조선의 현실과 대중의 정서를 명민하게 포착했다. “논과 밭을 다 팔아서 아들 공부시킨다는 것과 그렇게까지 공부시킨 아들이 의외로 광인이 되었다는 것은 농촌의 중류가정이면 실제로 당하는 경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대중들의 반응도 뜨거워서 1926년 상반기에만 11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유명 영화감독이던 이경손에 따르면, 「아리랑」이 상영되는 극장의 분위기는 마치 어느 의열단원이 서울 한 구석에 공개적으로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아리랑」을 과연 나운규가 감독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영화가 개봉될 당시 감독의 이름이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라는 일본인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운규 자신이 이 영화를 직접 연출했다고 밝히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와중에 있다. 이러한 논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지금까지 나운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막연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나운규를 둘러싼 연구는 지금부터 새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도 지금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막연하게 알려진 「아리랑」의 필름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다.

「아리랑」으로 불이 붙은 영화 붐은 그후에도 계속되었다. 윤봉춘 감독은 「아리랑」이 민중을 움직이는 힘에 감명받아 영화에 뛰어들었다고 고백할 정도이다. 또한 엄청난 흥행실적을 거둠으로써 이후에 영화가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대중문화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 1938년의 기록에 따르면 연극과 영화를 보러다니는 관객이 경성 시내에서만 하룻저녁에 1만 명 가량이나 되었고, 그후에도 관객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42년에는 연인원 2천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이규환 · 최인규 · 방한준 · 전창근 등 유명 감독들이 등장해서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를 잇달아 발표했다. 이론적인 접근과 비평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1935년에는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등장했다.

1932년에 나온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는 당시 「아리랑」 「장화홍련전」과 함께 3대 명화로 꼽혔다. 주인공 수삼은 뱃사공인데 자신의 생활터전인 한강에 철교가 건설되면서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된다. 더구나 공사 감독관인 일본인이 딸을 넘보자 분노가 폭발해서 도끼로 철기둥을 찍고 자신은 기차에 치여 죽는다. 여기서는 두 종류의 대립적 상징물들이 연달아 등장하는데, 물방아와 인력거, 나룻배, 동리패, 촌놈 등이 한 무리로서 전근대적인 농촌 현실을 표현한다. 반면 기계방아, 택시, 기차, 인부패, 서울 양복때기, 철교의 아치는 제국주의가 몰고 들어온 근대적 도시의 상징물들이다. 이 두 가지의 반복되는 대립 속에서 전통경제의 틀 속에 있던 주인공의 삶이 근대적 산업화에 의해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반면 1938년에 나온 방한준의 「한강」은 비슷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상이한 결말을 짓고 있어 흥미롭다. 주인공은 뱃사공의 아들인데 사공 자리를 자신에게 물려주려는 아버지에게 반항하다가 밤중에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고 몰래 도시로 떠난다. 1930년대는 조선에서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특히 일본의 군수산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한반도에도 중화학공장이 들어서고 그에 따라 노동자 수도 급증했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고 도망간 사공의 아들은 아마도 어느 도시에선가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가라앉힌 배는 어쩌면 몰락해가는 전통경제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1940년부터 영화계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일제의 영화정책 때문이었다. 사실 일제는 처음부터 영화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들이면서 한국영화 산업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정책을 꾸준히 강화해왔다. 그러나 일제가 가장 주목한 것은 영화가 가진 정치적 선전효과였다. 그들은 1940년에 ‘조선영화령’이라는 악법을 발표하면서 영화가 “국민오락으로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을 비롯하여 최근에 있어서는 선전 보도 등의 방면에까지 현저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그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실제로 1940년 이후에는 제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외한 그 어떤 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영화를 통해 황국신민, 내선일체, 일본어 보급, 전쟁 지원병 확보 따위를 선전했다. 이규환이 1939년에 일제의 정책을 홍보하는 영화 2편을 만들고 잠적해버린 일은 이 같은 현실을 웅변해준다.

그러나 진정으로 놀랍고도 심각한 사실은 다른 데에 있다. 지금까지 언급된 영화 가운데 단 한 편도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군데군데 산재하는 문헌자료와 소략한 증언자료들을 통해서만 희미하게 당시를 복원할 수 있을 뿐이다. 텅 빈 영상자료실, 영화 없는 영화사 서술! 이 자체가 식민지시기 역사의 흔적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우리 문화가 얼마나 황폐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이다.

전후의 부흥

해방과 6·25의 격변기를 지나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한국영화의 눈부신 전성기였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1955년 15편에서 1959년에는 연간 108편이 만들어졌고, 극성기 때에는 1년에 200편 이상이 제작되기도 했다. 그 동안 무관심과 무지 속에 외면당했던 이 시기 영화들을 발굴하고 새로이 바라보려는 노력도 최근에 시작되었다.

1955년작 「자유부인」(감독 한형모)은 바람난 교수부인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소재를 통해 흥행에 크게 성공함으로써 이후 한국 영화산업 부흥의 기틀을 마련해준 영화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연달아 겪은 황폐한 시절에, 미국식 자유주의와 소비주의에 취해 춤추고 비틀거리는 자유부인의 모습은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크게 흔들릴 조짐을 보여준다. 당시 이 영화를 관람한 여성 관객들은 ‘우리와 거리가 먼, 타락한 여자 이야기’라고 지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선망과 동경, 그리고 두려움이 교차했다고 회고한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은 1954년에 나온 국산영화 면세조치와 함께 영화산업을 한껏 고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가 주로 여성관객을 겨냥해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인데, 이들 ‘고무신 관객’ ‘아줌마 부대’는 우리나라 영화산업을 성립시키는 초석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성 위주로 영화를 기획하는 것은 여전한데, 이는 한국영화의 특성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각도로 연구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1961년에 나온 유현목의 「오발탄」은 한국영화사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는 북에서 피난 내려와 서울에 정착한 어느 가족을 통해서 당대 한국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른다. 이 가족이 사는 곳은 용산 미8군 뒤에 있는 해방촌이다. 박봉의 월급쟁이인 장남 영호를 중심으로, 늘 “가자, 가자!”라고 외치는 병든 어머니, 전쟁에서 돌아와 실업자로 전전한 끝에 은행을 터는 둘째아들, 미군부대 창녀로 전락한 여동생, 묵묵히 일만 하다가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는 아내, ‘나이롱 치마’와 새 신발을 사게 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 딸들이 촘촘히 둘러 서 있다. 이들 가족이 펼쳐가는 스토리 라인을 통해 유현목 감독은 전후의 황폐함과 함께 한국 전통문화와 미국문화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오발탄」의 포스터

1961년 4월에 개봉했던 이 작품은 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각종 문제들을 다루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의 강압으로 상영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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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은 감독이자 제작자로서 1960~70년대 한국 영화산업의 대부 역할을 했다. 그의 영화사인 신필름은 절정기 때 연간 28편의 영화를 쏟아냈고 산하 감독이 30여 명에 달했다. 그는 장르의 대가이자 테크닉의 장인이라고 평가된다. 군사정권에 의해 급격하게 근대화가 추진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을 통해 어지럼증과 혼돈에 사로잡힌 동시대의 풍경을 담아냈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재평가의 무대 위로 오르고 있는 가운데, 이 시기 한국영화사를 발굴, 기술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한 학자는 신 감독의 작품들이 전체적으로 “근대화에 의해 파괴된 공동체적 가능성에 대한 좌절의 기록이자 그 변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60년대 급격히 동요하는 대중들의 정서구조를 의미 있게 전달하려는 문화적 실천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한다.

예컨대 「천년호」의 경우, 억압과 폭력에 희생당한 여성을 천년 묵은 여우와 결합시킨 줄거리를 통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의 욕망과 원한에 대해 갖는 두려움과 그것을 잠재우고 순응시키는 작용을 어떻게 이루어내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국적 공포영화이다.

이 시기의 감독 가운데 최근 가장 뜨거운 재조명의 대상이 된 사람은 김기영이다. 리얼리즘의 거장 유현목과 장르의 대가 신상옥 사이에서 뒤로 가려져 있던 김기영 영화의 독특한 심리적 · 표현주의적 스타일이 갖고 있는 이질적인 영화미학이 오늘날 한국영화에 쏟아지는 기대와 시선에 가장 잘 부응하는 측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영화들은 비슷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발전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과 함께 여성성에 대한 프로이트적 강박을 짙게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하녀」 시리즈와 「이어도」, 「육식동물」 등의 영화를 통해서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주제를 반복하였다.

그의 영화 주인공은 종종 하녀, 즉 식모이다. 1960년대에 농촌여성들이 여공 혹은 식모의 신분으로 대거 도시로 진입했으나, 노동자 문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우리나라 영화 속에서 다루어지지 못했다. 김기영은 하녀라는 존재를 도시 중산층 가정에 나타난 이질적인 침입자로 설정하는 플롯을 통해, 붕괴된 농촌공동체가 도시에 가하는 위협, 유교 이데올로기 속에 숨죽이던 여성이 무력해진 가부장제를 향해 감행하는 도전, 중년 남성의 프로이트적 성심리 등을 미스테리 기법으로 풀어낸다. 영화사 연구가 이영일은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나온다”는 김기영 감독의 말을 빌려 그의 영화세계를 ‘마성의 미학’이라고 평했다.

그 외에도 한국영화사에 대한 폄하와 망각 속에서 묻혀버린 중요한 작가들은 적지 않다. 이는 영화에 가해졌던 정치적 · 사회적 압력과 무관하지 않다.

되살아나는 영화정신

1961년 4월에 개봉되었던 영화 「오발탄」은 5·16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상영금지를 당했다. 실성한 노파가 “가자, 가자!”라고 외치는 소리가 북으로 가자고 선동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일화는 이후 군사정권 아래서 계속될 수난의 신호탄이었을 뿐이다. 당시에 발행된 신문들의 기사색인만 보아도 분위기를 한눈에 감지할 수 있다.

사실 1950~60년대 르네상스 이후 한국영화가 급격히 쇠퇴하게 된 원인은 거의 전적으로 정부의 통제와 억압, 잘못된 정책에 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만든 ‘영화법’은 기업화를 촉진한다는 명분 아래 제작사를 대거 통폐합하고 제작에 간섭했으며 검열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통제를 실시했다. 이로써 영화인들로부터 치열한 열정과 비판정신을 빼앗고 영화를 고작 정부 이데올로기의 홍보수단으로 내모는 가운데 관객들은 떨어져나가기 시작했고, 때마침 일어난 TV 선풍으로부터 영화를 지켜낼 아무런 창의적 대안도 마련할 수 없었다. 또한 영화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외화 수입권을 미끼로 국가 시책에 부응하는 우수영화를 만들도록 강제함으로써 탈역사적인 문예영화나 반공영화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처럼 산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대타격을 받은 영화계는 1970년대에 고작 ‘호스테스 영화’라는 좁은 길목을 통해 가냘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의 한 장면

군사정권의 등장은 한국영화를 질식상태로 몰아넣었다. 정부의 통제와 억압은 한국영화를 고작 정부 이데올로기의 홍보수단으로 전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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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그 실신상태를 극복하기 시작한 것은 유신정권의 몰락이 빚어낸 1980년 ‘서울의 봄’ 이후였다. 다시 등장한 군사정권은 「애마부인」 류의 소프트포르노를 가장 먼저 허락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당시 소생하던 대중적 민주화운동과 짝을 맞추어 영화계에서도 문제의식에 가득찬 중량감 있는 영화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유현목 감독이 1980년에 「사람의 아들」을 발표하고, 이장호 감독이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 「바보선언」과 같은 리얼리즘 영화를 다시 불러들였으며, 임권택 감독이 그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만다라」, 「길소뜸」 등을 완성한 것도 바로 이 치열한 시기였다. 이 영화들은 모두 진지하고 현실적인 주제를 비판적인 시각과 실험적인 스타일로 소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수준과 검열이 직접적 상관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이들 작가와 작품들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영화의 힘과 가능성에 대해 새로이 눈뜨고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정신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독립영화의 탄생은 그 직접적인 산물이다. 대학가의 영화동아리인 ‘얄랴성’(1982년 결성)을 필두로 ‘서울영상집단’ ‘장산곶매’ ‘노동자뉴스집단’ 그리고 여성영화집단인 ‘바리터’를 거쳐 ‘푸른 영상’ ‘보임’ ‘청년’ 등으로 이어지는 독립영화계는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주류질서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비판을 영화 속에 담아내왔다. 독립영화계가 산출해낸 대표작들로는 「파업전야」, 「상계동 올림픽」, 「낮은 목소리」, 「변방에서 중심으로」 등이 있다.

「파업전야」의 포스터

독립영화는 주류세계가 눈을 감고 있는 소외된 현실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시도하였다. 정권은 이를 부당하게 탄압하였고, 그 상영을 둘러싼 대립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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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한국영화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별도의 넓은 지면을 요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영화의 산업적 가치에 대해 폭넓은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쥬라기공원」이나 「타이타닉」처럼 많은 외화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적의 상품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는 적지 않은 함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기서는 고도의 문화행정과 이론연구, 업계의 탄탄한 시스템 등 종합적인 여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문제 제기에 대한 답변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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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집필자 소개

1988년에 만들어진 한국사 학계의 전문 연구자 단체이다. 550여 명의 대학 교원, 대학원생이 연구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역사 교육과 역사 대중화..

김소희 집필자 소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제작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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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 저자한국역사연구회 | cp명역사비평사 도서 소개

지난 한 세기는 우리에게 과거 수백년에 맞먹는 변화가 일 어난 격동의 세기였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으며 이데올로기의 극 한 대립과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한데 뒤엉켜 좌절과 희망이 뒤엉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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