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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의 근간, 청년 독립운동가
이재현 ・ 한형석 ・ 송면수
李在賢 ・ 韓亨錫 ・ 宋冕秀출생 |
이재현 1917년 한형석 1910년 송면수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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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이재현 1997년 한형석 1996년 송면수 1950년 |
포상훈격 |
이재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한형석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송면수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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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에 호응한 청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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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에서 싸우고, 군가를 작사한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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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예술을 광복군가로 승화시킨 한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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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정훈의 상징, 송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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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독립정신을 승화시킨 청년 광복군
한국광복군 창설에 호응한 청년 독립운동가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하지만 외국 땅에서 망명 정부의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 국내와 유리된 상황에서 병력을 모집한다는 것 모두 광복군 창설의 난관들이었다.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정부에 의해 제약되었던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복원해 가는 한편, 중국 내 교민과 일본군에 있던 한인 청년들을 규합하며 병력을 증강해 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정진을 통한 ‘복국(復國 : 국토회복)’을 구상하였다.
광복군의 창설이 구체화되던 1939년, 청년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가 시안(西安)에 파견한 군사특파단에 속해 병력 모집에 나서는 한편,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이하, 전지공작대)라는 무장조직을 결성해갔다.
1939년 10월에 결성된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부터 한국국민당을 지지하는 우익계 청년까지 아우르는 무장 단체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항일전선에 본격 가담하던 한인 청년들은 전지공작대 등을 거쳐 결집되고, 다시 한국광복군 5지대, 이어 제2지대의 중심 병력이 되었다. 송면수, 한형석, 이재현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전지공작대에 참여하고, 광복군에 합류한 청년들이었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군가를 작사한 이재현
1917년 2월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이재현은 1919년 부친 이용환(李龍煥)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부친의 뜻에 따라 형 이재천(李在天, 1913~미상, 애국장)은 동명학교(東明學校)를 다녔으며, 이재현은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32년을 전후하며 이재현은 형 이재천과 함께 상하이와 항저우, 난징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이미 상하이 한인 소년들과 결성한 화랑사(花郞社)에 가담하던 그는 ‘상해소년동맹’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광복, 안공근 등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 소위 ‘김구 특무대’로도 불린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에 입단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광둥성 일대로 활동 반경을 넓힌 그는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한인 청년들과 접촉하는 한편, 안우생으로부터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어를 사사받기도 했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단한 그는 1939년 특무대 예비훈련소를 졸업한 후 김인 등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창설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전시간부훈련 제4단 한인특별반에 입교, 특별과정을 수료하고 소위로 임관하였다. 전지공작대 공작조장 등을 맡은 그는 일본군 배후 공작과 한인 병사 모집을 담당하여 산시성 시안을 넘어 태항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41년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되자, 제5지대 공작대 행동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42년 3월 지대장 나월환이 부하에게 살해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사실상 연좌 책임으로 1년 이상 고초를 겪었다.
1944년 광복군에 복귀한 그는 제2지대에 배속되어 정훈을 담당하는 한편, ‘제2지대가’를 작사하기도 했다.(한국광복군 제2지대 전우장안회, 『불굴의 민족혼』, 1994) 또한 그는 임시정부와 미국 간의 공조를 담당하던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연락을 맡기도 했으며, 국내 진공 작전인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시안에서 근무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에는 베이징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 소속 군인의 신원 인계와 한인들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항일예술을 광복군가로 승화시킨 한형석
1910년 2월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한형석(韓亨錫)은 독립운동가 한흥교(1885~1967, 1990년 애국장)의 차남이었다. 의사였던 부친 한흥교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베이징, 항저우 등지에서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중국군의 군의 등으로 활동하였고, 신규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참여하며 중국지역 독립운동에 일조하였다.
부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한형석은 1915년 가족과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육영소학교, 육영중학교,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성환(1875~1948, 대통령장, 1962)의 권유로 구국 예술 운동에 뜻을 두게 된 그는 상하이 신화예술대학(新華藝術大學) 예술교육과에서 음악과 연극 등을 전공하고 1933년 졸업하였다. 이 무렵 상하이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한인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졌고, 이에 한형석은 한유한(韓悠韓)으로 개명한 후, 화북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산둥성(山東省)과 개봉(開封), 서안(西安) 등지의 학교에서 예술교사를 지내거나 중국 국민군에서 항일연극대장 등을 맡기도 했다. 1939년에는 중국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 대장을 역임했다.
1939년 1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에 참여한 그는 예술조장이 되어 항일 선전을 위한 예술 활동을 책임졌다. 1940년 5월 한중 연대의 일환으로 시안(西安)에서 열린 ‘아리랑’ 공연은 한국 청년의 항일 의식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랑 공연의 연출과 위문 연극 ‘한국의 한 용사’를 편극한 그는 가극 ‘아리랑’까지 작곡 ・ 편곡 ・ 지휘하며 10일간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1940년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에 설치된 한국청년훈련반(이하 한청반)에서 교관을 맡기도 한 한형석은 1941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이는 1941년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에 따른 것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 선전부장을 담당한 그는 광복군의 공식 군가인 ‘광복군가’를 짓고 ‘압록강 행진곡’ 등을 작곡하였다. 최전선에서 이뤄진 선전 활동에 힘입어 광복군은 지속적으로 병력을 증강할 수 있었다. 1943년 그가 간행한 『광복군가집』 제1, 제2집은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광복 후 산둥성 지난(濟南) 등지에서 한인 교포를 보호하고 귀환을 돕는 활동을 하던 그는 1948년 9월 칭다오(靑島)를 통해 30년 만에 조국으로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한국광복군 정훈의 상징, 송면수
1910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난 송면수는 평양에서 성장하며 기독교계 학교인 광성소학교와 광성고등보통학교 등을 졸업하였다. 1929년 광성고보를 졸업한 후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이듬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중국 공학대학(公學大學) 경제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이때 구익균 등과 학술적 교류를 시작하는 한편, 김두봉으로부터 한글 교육을 받으며 민족 교육에 심취하게 되었다. 일시 귀국했던 송면수는 1933년 다시 중국행을 선택하여 광저우(廣州)에 있는 중산대학(中山大學)에 입학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중산대학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든 곳이었는데, 그 중에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를 맡고 있는 김붕준의 딸 김효숙도 있었다. 송면수는 김효숙을 비롯한 한국인 학생들과 교류하며 한글 전파에 힘썼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국민당계 청년들을 결집하여 무장유격대를 결성하기도 했다. 유격대는 1937년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근간이 되었다. 문화활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던 그는 광저우에서 한글 납활자를 고안한 후, 피난길에도 지고 날랐다고 한다.
임시정부 피난길을 함께한 송면수는 1938년 창사(長沙)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서 공연된 「삼일혼(三一魂)」과 「전야(前夜)」 두 편의 연극 극본을 짓고 직접 연기하기도 했다. 이어 류저우(柳州)에서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결성을 주도하고, 희극조의 대표를 맡아 청년공작대의 선전 예술활동을 책임졌다. 이때 그는 한중연합군의 투쟁을 그린 「국경의 밤」과 부상당한 병사를 민중들의 보살핌을 그린 「상병의 벗」 두 편의 단막극을 연출하였다.
1939년 11월 전지공작대 창설에 참여한 그는 계속해서 항일 연극 등을 연출하며 선전 활동을 책임졌다. 그리고 1940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통신병과를 이수하여 1943년 졸업하였다. 그 사이 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됨에 따라 송면수는 제2지대의 정훈조장을 맡게 되었다.
1943년 8월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회에 참가한 그는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 주임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임시정부 활동을 병행하였다. 1944년에는 문화부 편집위원과 선전부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광복군 9개 행동준승이 폐지되고, 미군과의 공조가 진전되자 미국 OSS와의 정보활동을 담당했다.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할 당시 그는 정진군 황해도반장에 임명되어 두취(杜曲)에서 임무 수행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일본군에 배속되었다가 중국군의 포로가 된 한인 장병 등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그는 1946년 5월 조국으로 귀환하였다. 귀국 후 국방부 창설에 참여한 그는 국방부 초대 정훈국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군 정훈’의 기초를 다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예술로 독립정신을 승화시킨 청년 광복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이지만, 독립전쟁을 실현할 군대 창설은 임시정부의 수립 이후 계속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은 광복군 창설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독립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가장 먼저 호응한 것은 독립운동가의 일원인 청년들이었다. 한형석은 아버지를 따라, 이재현은 형과 함께, 송면수는 김효숙과 부부의 연을 맺으며 독립운동의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모두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초모 공작과 선전 활동을 벌였고, 한국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된 이들은 정훈 ・ 예술 활동을 통해 광복군을 선전하고 입대를 독려하였다. 한편으로 한글과 노래, 연극을 통해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전파하는데 앞장섰다.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과 예술적 감성을 결합, 승화시킨 이들의 독립운동은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된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창의적 애국혼을 방증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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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가보훈부에서 제공하는 독립운동가의 자세한 생애와 공적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