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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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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그리고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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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이 된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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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의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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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무대로 나오지 못한 자석
인류가 맨 처음으로 알게 된 전기는 정전기(靜電氣, static electricity)이다. 고대로부터 호박(琥珀, amber)이나 흑석(黑石, jet)과 마찰하면 털을 끌거나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영국의 자연 철학자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전기를 ‘지푸라기와 같은 가벼운 물체를 끌어당기고, 바늘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1663년에 독일의 과학자 오토 폰 게리케는 정전기 발전기를 만들어낸다. 이때 게리케는 진공의 힘을 보여주는 실험으로 이미 유명해진 뒤였다(작고 근본적인 물질 항목 참조). 정전기 발전기(혹은 마찰기계라 불림)는 황(黃, sulfur)으로 된 공을 손으로 돌리거나 문질러서 정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뉴턴은 황 대신 유리를 비롯하여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1746년에 만들어진 정전기 발전기는 커다란 바퀴를 이용해 여러 개의 유리공을 회전시키면서 비단 실에 매달린 포신과 칼을 도체로 이용했다. 이 밖에 손 대신 가죽 쿠션으로 정전기를 발생시키는 장치도 있었고 1785년에 만들어진 장치는 토끼 가죽을 이용하기도 했다.
전기와 관련된 실험은 18세기에 들어서며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다양하게 정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대중을 상대로 한 과학 강연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다. 네덜란드의 수학교사인 피터르 판 뮈스헨브루크와 독일의 목사였던 에발트 게오르그 폰 클라이스트는 1744년경에 각각 독자적으로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용기인 라이덴 병(Leyden jar)을 만들어냈다. 병의 일부분을 물로 채우고, 코르크 마개에 연결된 금속 막대가 물에 잠긴 형태인 라이덴 병은 전기를 저장하는 단순한 구조의 장치이다. 병의 외부를 금속 박으로 둘러싸면 보다 효과적으로 전기를 저장할 수 있었다.
폰 클라이스트는 전기가 담긴 라이덴 병을 만졌다가 바닥에 넘어질 정도로 강력한 전기 충격을 받은 적도 있었다. 전기 실험에 있어 라이덴 병은 필수품이 되었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콘덴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라이덴 병에 저장되는 전기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병 안에 담긴 물이 아니라 유리에 저장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최초의 전기자극 치료기?
고대 이집트인들은 전기메기(electric catfish)를 의료 목적으로 사용했고, 로마인들은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전기가오리(black torpedo fish)를 이용했다. 전기가오리는 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경피(經皮) 신경 전기 자극 치료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며 통풍이나 두통, 외과 수술, 출산 시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물고기는 물 밖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이런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전기가오리를 대신하는 물건을 만들어내고자 한 노력의 결과, 1776년 헨리 캐번디쉬가 가죽 전기가오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캐번디쉬는 전기가오리처럼 생긴 모양의 나무를 만들었지만 나무는 도체가 아니었으므로 제대로 동작할 리가 만무했다. 두 번째 시도는 양가죽으로 물고기의 형상을 만들고 양쪽에 주석판을 대었다. 주석판을 라이덴 병에 연결하고, 물고기 모양의 양가죽을 소금물에 담갔다. 물속에 손을 넣으면 전기가오리 옆에 손을 가까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기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연, 그리고 번개
독립선언문의 기초를 다진 미국의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은 1752년, 번개가 전기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다. 금속 막대를 장착한 연을 날리고 줄의 끝에 열쇠를 달아서 라이덴 병 옆에 위치하도록 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실험에서 번개가 치기도 전에 비구름 속에 있던 전하가 젖은 연줄을 타고 열쇠에 전달되어 열쇠와 라이덴 병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랭클린은 전기가 양 또는 음의 전하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프랭클린이 발명한 피뢰침은 번개로 인한 전기가 금속관을 통해 땅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종을 울리도록 하여 사람들을 번개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1752년에 쇠막대기를 이용해 번개의 전기를 집으로 끌어오는 실험을 했다. 쇠막대기에 전기가 흐르면 종이 울리도록 해 두었는데, 전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
번개나 천둥이 치지 않았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 울리는 일이 때때로 일어났는데, 이럴 때는 항상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을 때였다. 어떤 때는 종이 울린 뒤 곧바로 번개나 천둥이 치기도 했고, 종이 울리지 않았는데 쇠막대에 불꽃이 튀고 난 뒤 종이 울리기도 했다. 전기의 행태는 일정한 것 같지가 않았고, 작은 전기로 인해 종이 울리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한번은 종이 울리자마자 불꽃이 심하게 일었는데, 계속되는 불꽃의 크기가 마치 크로족(族) 인디언의 머리 장식만 했다. 돌풍이 부는 동안에도 반응은 일정하지가 않았다.
- 벤자민 프랭클린, 1753
유행이 된 전기
전기와 관련된 실험은 마치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이 때문에 생각지 못한 불운을 맞이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에 대한 실험을 체계적으로 시도한 첫 번째 인물은 영국의 염색공이자 과학을 취미로 삼고 있던 스티븐 그레이이다. 그는 어린 소년에게 대전(帶電, charged)된 유리막대를 들게 하고 절연된 줄로 아이를 매달아 놓은 뒤 아이의 코와 유리막대 사이에서 불꽃이 일어나게 하기도 했다.
그레이가 이런 장난스러운 실험만 한 것은 아니어서, 1729년에는 전기가 물을 포함한 전도체를 통해 다른 물질로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도 했고, 손을 잡은 사람들을 통해 전기가 전달되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학자인 샤를 뒤페는 그레이의 실험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하여 1733년 모든 물체와 생체는 전기를 가지고 있으며 전기는 음과 양의 두 가지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1786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루이지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에 전기를 가하고 개구리 다리가 전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을 실험으로 확인했다. 갈바니는 이런 현상이 전기가 개구리의 신경을 타고 흘러 근육이 움직인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전기의 이용
전기를 실생활에 이용하려면 원할 때 전기를 만들고 방출하는 방법을 알아내야만 한다. 원시적 형태의 전지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에 의해 만들어졌고, 전압의 단위인 볼트(v)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볼타가 전지를 만든 것은 1800년인데, 그가 만든 전지는 아연, 구리, 종이판을 소금 용액 속에 쌓아놓은 것이었다. 볼타는 자신이 만든 장치가 전기를 만들어내는 원리를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전지가 제대로 작동했으므로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철 내부에서 일어나는 전하의 이동은 1884년 스웨덴의 화학자 스반테 아우구스트 아레니우스에 의해 밝혀진다. 독일의 물리학자였던 게오르그 옴은 1827년 볼타의 전지를 이용한 연구를 통해 그의 이름을 딴 법칙을 발견했다. 옴의 법칙에 따르면 전기가 도체를 통과할 때 전류와 전압, 저항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 (I는 전류, V는 전압의 차이, R은 전기저항)
I = V/R
물질의 전기저항 값은 항상 일정하므로 전압의 차이는 곧바로 전류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 무대로 나오지 못한 자석
전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기(磁氣, magnetism)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쇠를 끌어당기거나 남북을 향하는 신비한 힘은 고대에도 이미 알려진 것이었지만, 이것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탈레스가 이미 기원전 6세기에 자력에 대한 관찰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기원전 800년경에는 인도의 외과의사이며 작가였던 수쉬루타가 몸에 박힌 금속을 제거할 때 자석을 이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자석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은 기원전 4세기 중국의 문헌인 《귀곡자(鬼谷子)》에 나오는 ‘(천연)자석은 쇠를 끌어당긴다’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천연자석은 함유된 자철광으로 인해 자기를 띠게 된 암석이다. 이런 암석이 벼락을 맞으면 내부의 자성을 띤 결정구조가 정렬되어 자석이 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점쟁이들이 천연자석을 점술판으로 이용한 기록도 있다. 서기 270년경에는 천연자석을 나침반의 용도로도 이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항해에서 나침반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1117년 주위(朱彧)가 쓴 《평주가담(萍洲可談)》에 나오는 ‘항해사는 뱃길 주변의 지리를 잘 알고 있으며, 밤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아 방향을 파악한다. 구름이 낀 날에는 나침반을 이용한다’라는 구절이다.
항해용 나침반은 유럽에서도 만들어졌는데, 중국의 나침반이 방향을 24개로 구분했던 것에 비해 유럽의 나침반은 16개로 구분했다. 유럽에서 나침반 사용이 시작된 후에도 중동에서 나침반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반이 (중동을 거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 같지는 않다. 중국과 유럽 나침반의 또 다른 차이점은 중국의 나침반은 남쪽을 향했던 반면, 유럽의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킨다는 점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인물인 영국의 윌리엄 길버트는 과학적으로 자기(磁氣)에 대한 연구를 최초로 시도했으며 ‘호박(琥珀, amber)의’라는 의미의 라틴어 ‘엘렉트리쿠스(electricus)’를 만들었다.
1600년에는 자기와 전기에 관한 여러 가지 실험 내용을 담은 《자기에 대하여(De Magnete)》를 펴냈는데, 이 책은 남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신비한 기능을 이성적으로 접근한 첫 사례일뿐만 아니라, 지구가 자석이기 때문에 나침반이 동작한다는 주장도 담고 있다. 또한 길버트는 마늘이 나침반의 동작을 방해한다는 속설(당시 마늘을 먹은 선원들은 배의 나침반 근처에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과, 지구의 북극에 있는 거대한 자석산 때문에 나침반이 움직이며 자석산 근처에 가면 배 안의 모든 금속이 자석산에 끌려갈 것이므로 북극 근처로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미신을 불식시키고자 했다.
자석의 힘에 대한 속설 중에는 쇠로 만들어진 마호메트의 관이 두 자석 사이에 놓여서 공중에 떠 있었다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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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967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중세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으며,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과학과..
출처
원자론의 개념을 처음 제안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그 후 아랍의 과학을 거쳐 르네상스, 계몽주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우주 물질의 기원을 밝힌 현대의 과학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본질과 근원을 찾으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