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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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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석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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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에 형성된 석유 메이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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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세계시장 거머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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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더드오일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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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문어발식 확장으로 사업 범위 넓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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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황금을 장악한 7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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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이면에 있는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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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기 전문 세력이 지배하는 석유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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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죽음을 당한 마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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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와 4차 중동전쟁, 그리고 오일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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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기업, 수는 줄었지만 영향력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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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에너지 위기를 국가안보 위기로 규정
중동 석유의 역사
19세기 석유 개발업자들이 중동의 석유 매장을 확신하게 된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구약성경》 〈창세기〉, 특히 ‘노아의 방주’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 나오는 ‘역청’ 부분이었다. 기업들이 석유에 관심을 쏟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 석유램프가 세계적인 히트상품이 되고부터다. 석유가 나올 것 같으면 세계 곳곳을 찾아다녔다. 영국 BP의 창립자 윌리엄 녹스 달시(William Knox D’Arcy)도 그중 하나였다. 금광 개발로 큰돈을 거머쥔 그는 페르시아 개발권을 인수해 유전 개발에 돌입했다.
그러나 BP는 실패 일보직전까지 가야 했다. 무려 8년 동안 찾아 헤맸지만 어디에서고 상업적인 성공을 보장할 만한 석유를 찾지 못했다. 1908년 1월 BP 본사는 페르시아 채굴 책임자에게 철수 준비를 지시했다. 4개월 후 5월 26일, BP는 마침내 행운을 거머쥔다. 지금의 이란 자고로스 산맥 인근에서 석유가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무려 15미터에 이르는 석유기둥은 당시 시추 요원들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대규모 유전이었다. 영국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중동 지역 석유 개발 붐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중동은 세계 최대 석유 매장 지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중동 석유의 역사가 개막된 것이다.
중동에서 석유가 나오자 처칠은 “이제 중동 장악이 세계 지배의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동을 차지하면 이기고, 빼앗기면 진다는 의미였다. 영국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동을 장악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영국이 외국에 연료를 일방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국가적 존망이 달려 있는 문제였다.
자국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것은 적국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였다. 1차 세계대전 중 중동을 둘러싼 한판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는 중동은 1914년 1차 세계대전부터 열강의 격전장이 된다. 신이 내린 축복이 이들에게는 재앙이 된 것이다. 중동은 당시 석유 자원의 혜택을 몰랐고 사용할 줄을 몰랐기 때문에 채굴 초기부터 석유 자원은 미국과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석유 메이저들의 소유가 되고 만다.
20세기 초에 형성된 석유 메이저들
석유 메이저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1901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 하루 10만 배럴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유전의 발견이었다. 이것이 ‘걸프’와 ‘텍사코’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텍사스 주 유전 개발의 단초가 되었다.
같은 해 윌리엄 달시는 페르시아 왕국으로부터 60년 동안의 배타적인 조광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1906년 페르시아석유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페르시아석유회사는 1954년 이란의 석유국유화분쟁으로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성장하던 로열더치사는 1907년 수송 및 판매 부문을 전담하던 쉘 무역운송회사와 통합해 로열더치쉘을 발족시키고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으로 진출을 확대해 메이저 형성의 기틀을 마련했다.
록펠러, 세계시장 거머쥐다
록펠러는 미국 내 정유업계를 평정한 후 목표대로 세계시장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시장에도 손을 뻗어 국제 독과점기업을 형성했다. 1882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의 일부로 ‘엑슨’을 설립했다. 1888년에는 영국에서 석유를 판매하기 위해 ‘Esso Petroleum Co.’의 전신인 ‘앵글로아메리칸오일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나중에 ‘에소(Esso AG)’가 되는 독일 회사의 지분을 인수해 대주주가 되었다. 1898년에는 캐나다의 대표적인 석유회사인 ‘임페리얼오일’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이렇게 미국 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과 정유소를 소유한 거대한 회사로 성장했다.
한편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내 최대 석유기업인 스탠더드오일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1911년 반트러스트법에 의해 스탠더드오일은 34개사로 분할되었다. 판결이 내려질 무렵 스탠더드오일의 원유 정제 시장점유율은 78%. 굴러다니는 유조차의 절반 이상을 보유했다. 내수 및 수출용 휘발유의 85%, 철도회사가 사용하는 윤활유의 90%가 스탠더드오일에서 나왔다. 심지어 기선 78척, 범선 19척에 자체 해군까지 보유했다. 이때 분할된 뉴저지스탠더드, 소코니, 캘리포니아스탠더드 등 여러 개 회사가 다시 헤쳐 모여 현재의 엑슨모빌로 발전했다.
1926년 에소라는 상호를 여러 제품과 계열사들에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다른 스탠더드오일 회사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엑슨(Exxon)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계열사들도 엑슨의 이름을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외국 계열사는 그대로 ‘에소’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1938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록펠러의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 곧 ‘소칼’이 초대형 유전을 발견했다. 지금의 ‘쉐브론’이다.
그 뒤에도 세계시장 진출은 계속되어 세계 80개국 이상에서 사업 활동을 하면서 70개 이상의 정유시설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20세기 말 같은 스탠더드오일 후예 기업의 하나인 모빌(Mobile)을 흡수해 엑슨모빌로 재탄생했다. 이로써 로열더치쉘그룹을 누르고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이 되었다.
1999년 12월 1일은 세계 석유업계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날이었다. 미국 석유업체 랭킹 1위인 엑슨과 2위인 모빌이 합병을 선언한 것이다. 두 회사가 합쳐진 엑슨모빌은 단번에 로열더치쉘과 BP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BP도 미국계 아모크와 합병을 발표했지만, 엑슨모빌의 덩치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엑슨과 모빌의 합병은 석유업계 관계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1911년 반독점법에 의해 강제로 분할된 뒤,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87년 만에 재결합하게 된 것이다. 엑슨모빌은 한때 하루 생산량이 25억 배럴을 넘어 쿠웨이트와도 맞먹는 규모를 자랑하기도 한 거대회사다.
엑슨 모빌은 2000년 들어 전 세계에 걸쳐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 생산, 공급, 운송, 판매 등에 관여하면서 거의 210억 배럴에 상당하는 석유를 비축하고 있으며, 정유시설에서는 매일 600만 배럴 이상을 처리한다. 그리고 엑슨, 에소, 모빌의 브랜드를 통해 118개국 4만 5천 개소의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 판매하기도 하며, 석탄 채굴, 광물, 전력 생산 기업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스탠더드오일의 부활
록펠러는 ‘독점’에 대해 나름대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불필요한 경쟁이 사라지고 ‘하나의 가격’으로 통일되면 세상은 더욱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석유 시장을 지배할 경우, 석유 시장을 효율적으로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34개로 갈라진 스탠더드오일은 쪼그라들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엑슨과 모빌, 쉐브론 등 스탠더드오일에서 갈라져 나온 회사들은 국제적인 메이저로 성장했다. 해체 후 1년 만에 후계회사들의 주가는 대부분 두 배로 뛰었다. 덕분에 록펠러도 9억 달러 이상의 주가 차익을 얻었다. 오늘날 국제 석유업계의 상황은 이전과 딴판이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고 쉐브론과 텍사코, 코노코와 필리스가 합쳤다. 스탠더드오일의 부분적인 부활인 셈이다.
스탠더드오일이 여러 개 회사로 쪼개지면서 독점에 대한 록펠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대신 외국 회사들과 연대해 또 하나의 카르텔을 만들었다. 세계 석유업체들이 가격담합을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1911년부터 1975년 곧 오펙(OPEC) 이전까지 세계 석유가격을 하나로 단일화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세계 석유회사들이 모두 ‘서부 텍사스 원유 값’에 자신들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석유는 세계 어디서 사던 거의 같은 값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지금도 세계 석유가격의 기준 역할을 하는 WTI(West Texas Intermediate)다. 서부 텍사스 원유가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인 뉴욕상품거래소(New York Mercantile Exchange, NYMEX)에 상장된 중심 유종이기 때문이다. 영국 북해에서 생산되는 브렌트유, 중동에서 생산되는 두바이유와 함께 세계 3대 유종으로 꼽힌다. 통상 생산비가 높고 품질이 좋아 국제 원유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을 형성한다.
록펠러, 문어발식 확장으로 사업 범위 넓혀
록펠러의 독점에 대한 꿈은 석유 산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탠더드오일은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지배하는 지주회사로 개편되어 체이스맨해튼은행, 선박, 철강, 석탄 등으로 사업 범위를 확대했다. 자본금 1억천만 달러, 연간 이윤 4500만 달러, 록펠러의 재산은 2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이후 사업 확대에 따라 철광산, 삼림 등을 지배하기 위해 제조 · 운송업 등 수십 개의 회사를 거느렸다. 그는 전 세계 지구상의 유전에 대한 독점적 지배에 표적을 두었다. 그의 재산은 20억 달러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록펠러는 일찍이 38세에 미국 정유 산업의 95%, 세계 석유 산업의 62%를 차지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1919년에는 석유 왕 존 록펠러가 최대 납세자였다. 소득세가 처음 공개된 것은 1925년으로, 존 록펠러 2세는 628만 달러,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260만 달러, 그 아들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216만 달러의 세금을 납부했다. 현재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와 화폐가치를 놓고 보면, 빌 게이츠의 재산은 록펠러의 삼분의 일에 불과하다고 한다.
검은 황금을 장악한 7자매
엑슨과 모빌이 합병하기 이전에 세계 석유업계는 7개의 주요 국제 석유회사들이 장악했다. 이들을 메이저라고 불렀고, 7개 회사를 지칭해 ‘세븐 시스터즈’라고 했다. 미국의 엑슨, 모빌, 걸프, 쉐브론, 텍사코, 영국의 브리티시석유와 영국-네덜란드 합작의 로열더치쉘 등 7개사였다.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석유의 생산, 유통, 정제, 판매 등 유통망 전체를 장악한 회사들이었다. 세계 석유 산업을 지배해온 이들 7대 메이저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68%를 기록한 바 있으며, 한때는 중동 석유 생산의 99% 이상을 장악하기도 했다. 미국 메이저는 물론 유럽의 메이저들도 대부분 유대계 자본이라 한다. 석유 산업에서도 유대인들의 장악력은 계속 이어졌다.
이들 메이저는 1920년대 이후 세계 석유 산업을 지배해 1차 석유위기가 발발한 1973년에는 자유세계 원유 공급량의 64.4%, 원유 처리량의 50.9%, 제품 판매량의 60.8%를 차지했다.
1970년까지 원유는 배럴당 1달러대인 반면, 소비자들은 휘발유를 1리터당 1달러에 구입하고 있었다. 여기에 산유국의 정부 지분율은 메이저 석유회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제값을 받으려는 산유국의 시도가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강대국에 의해 번번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도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유전 개발-생산-정제-판매’ 과정을 지배하면서 떼돈을 벌었다. 이에 반해 산유국들이 얻는 이익은 형편없었다. 1960년에 결성된 OPEC은 산유국들이 메이저들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이들 석유 메이저는 1970년대 말까지 세계 석유 생산의 절반을 지배했다. 그러나 1979년 2차 석유위기 이후에는 메이저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들이 현재 내놓는 생산량은 전체의 13%에 불과하다. 전통의 석유 메이저를 대신해 세계 석유 생산의 지배권은 산유국의 국영 석유기업들에게 넘어갔다. 사우디의 아람코(Saudi Arabian Oil Company), 러시아의 가스프롬(Gazprom),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 등이 대표적 예다. 대신 메이저들은 석탄, 원자력, 석유화학 등 다른 부문에 진출해 종합 에너지 산업 회사로 발전하고 있다.
전쟁의 이면에 있는 석유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는 독일이 중동 지역으로부터 안정적인 석유 공급 확보를 위해 베를린-바그다드 노선을 건설하려 하자 영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도 코카서스 지방의 유전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 지방은 풍부한 석유산지로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공화국 등이 있다. 일본은 그들이 장악한 동인도제도의 석유 자원이 미국의 위협으로 불안해지자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이렇듯 전쟁의 이면에는 석유가 있었다.
20세기 후반의 석유전쟁은 1991년 쿠웨이트에서 발발한 걸프전이 그 출발이다. 독재로 얼룩진 불량 정부가 존재하는데도 미국은 할 수 없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려고 50만 병력을 파병했다. 쿠웨이트가 여섯 번째 석유 보유국이 아니었다면 미국이 이라크의 점령으로부터 쿠웨이트를 해방시켰겠는가 반문하면 답은 자명하다. 미국이 전쟁을 불사한 것은 석유 통로를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두 번째 석유전쟁 공포가 터졌다. 9 · 11 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은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여객기 공격이다.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주도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대미투쟁이자 사우디에 친 빈 라덴 정권을 수립해 세계 석유의 25%를 장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석유를 둘러싼 세 번째 공포는 2003년 3월,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대를 이어 이라크를 불법 침공하면서 벌어진다. 미국은 영국과 결탁해 침공 이유를 이라크의 알카에다 지원과 대량살상무기 보유 등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증거도 발견치 못했고 국제연합(UN) 결의도 없이 침공을 자행한 것으로 미루어 석유 자원의 확보가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이라크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는 것도 석유다.
투기 전문 세력이 지배하는 석유업계
석유 산업은 오래전부터 메이저들이 독과점 카르텔을 맺어 지배한 산업이었다. 한 나라의 혁명이나 내란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개입해온 것처럼, 유가변동에도 그런 공작이 있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석유 수급에 불일치가 예상되자 석유 실물자산에 대한 유대계 헤지펀드의 투기적 매점매석으로 유가를 급등시킨 바 있다. 헤지펀드는 석유 등 실물자산에 대한 투기를 일삼고 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리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원유가격의 등락이 심한 편이다.
석유 수급에 문제가 생기자 모든 상품에 그렇듯이 가격 오름세를 예상하는 투기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 ‘투기세력 주범론’이 힘을 얻는 것은 금융자본의 투자 확대로 원유 시장의 가격상승 폭이 커졌기 때문이다. 원자재가격에 투자하는 상품지수펀드 규모가 지난 5년 동안 130억 달러에서 2600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 기간 상품지수를 구성하는 25개 원자재가격은 평균 180% 뛰었다.
원유가격은 2002년 20달러가 채 안 되었다. 그 뒤 2007년 상반기에 60에서 70달러로 오르기까지 5년이 걸렸다. 하지만 2008년, 1년 동안에 70달러 이상 뛰어 140달러까지 치솟았다.
전통적인 수급불균형의 시장요인이 지속적인 가격상승을 유도했지만, 1년 만에 가격이 이처럼 급등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부동산 시장과 주식 시장 침체에 따라 금융자본이 원유 선물 시장으로 몰려 가격상승을 유도했다.
이들 투기자본들은 주로 선물매매를 통해 현물 시장의 초과수요를 부추겨 가격을 상승시켰다. 적어도 고점대비 삼분의 일 이상은 이들 투기자본에 의해 부풀려진 가격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투기행위를 막기 위해 투기방지법안이 미 의회에서 논의되어 상정되었으나, 석유재벌 부시의 입김으로 부결된 바 있다. 에너지 관련 헤지펀드는 2004년 180개에서 2009년 630여 개로 늘었고, 이 가운데 원유 전문 헤지펀드만 200개가 넘는다.
2008년 7월 중순 유가가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배럴당 무려 147.17달러. 연말이면 200달러로 치솟을 것이라는 ‘슈퍼 스파이크’론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 아니냐는 공포가 지구촌을 휩쓸었다. 그러나 불과 사흘 만에 유가는 10% 폭락했고 두 달 후엔 90달러 선까지 무려 50달러나 떨어졌다. 세계 석유수요가 별로 줄지 않았고, 더구나 중동 산유국들이 모여 하루 50만 배럴을 감산하기로 결의하고 멕시코 만 유전지대에서 생산량이 5% 줄었는데도, 유가는 떨어졌다. 또한 송유관이 지나는 조지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태풍 아이크(Ike)가 미국 정유시설의 25%를 손상시킬 거라는 보도에도 불구하고 석유가격은 속절없이 계속 추락했다. 결국 그해 연말 40달러 선을 밑돌았다.
그 추이를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원인은 명확했다. 금융투기세력들이 급속히 석유 시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8월로 접어들면서 뉴욕상품선물거래소(NYMEX)에서는 원유 선물 거래에 뛰어들었던 투기세력의 매수포지션이 급감하고 그에 따라 전체 거래 중 순매수포지션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투기세력이 황급히 빠져나간 것이다. 그 뒤 유가는 다시 서서히 오름세로 돌아섰다.
2011년 4월, 버락 오바마(Barak Hussein Obama) 미국 대통령은 국제유가 100달러시대 배후로 투기세력을 지목하고 법무부에 특별조사팀을 꾸렸다. 조사팀은 석유시장 트레이더와 헤지펀드 등 투기성 거래와 선물시장의 원유 인덱스 조작 의혹 등을 조사했다. 하지만 상품 시장에서는 여전히 유가가 상승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서인지 그 뒤로 투기세력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마테이
1962년에 일어난 ‘마테이 사건’은 ‘세븐 시스터즈’와 영미의 세계 석유 시장 직접 통제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준다. 1945년 이탈리아 국영 석유회사의 책임자로 임명된 엔리코 마테이(Enrico Mattei)는 적극적으로 탐사에 나서 석유 매장지와 가스전을 잇달아 찾아냈다.
천연가스를 산업도시인 밀라노와 토리노로 운반하고자 4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한편,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낮은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1957년 마테이는 세븐 시스터즈가 아직 ‘배분’하지 않은 이란 지역의 2만 3천 제곱킬로미터를 시추하고 개발할 수 있는 25년 동안의 독점권을 갖는 대신 수익의 75%를 넘기는 파격적인 내용의 협정을 체결한다.
당시 영미 메이저 회사들은 50대 50으로 배분한 뒤 운송 부문의 이익을 조작해 막대한 수익을 남기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마테이는 1958년 소련과 원유를 구매하는 협정을 맺는데, 대금은 현금이 아니라 대구경 송유관을 인도하는 형식의 현물로 지불하기로 했다. 소련은 볼가-우랄 산맥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로 이어지는 거대한 송유관망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막대한 물량의 소련 석유가 동유럽을 거쳐 서유럽으로 공급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원유는 동유럽에서 소련에 필요한 공산품과 식량으로 교환될 것이다. 석유 메이저들과 영미 정부에게 마테이는 1928년 이후로 유지되어온 세계 석유 질서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1962년 9월 마테이가 건설한 제철소가 소련의 송유관 공사에 투입할 파이프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불과 한 달 뒤인 10월 27일, 마테이의 전용 비행기는 시칠리아를 이륙해 밀라노로 가던 도중 공중에서 폭발하고 만다. ‘일곱 공주’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의 사망 당시 나이는 56세였다.
비슷한 시기 로마 주재 미 CIA의 책임자가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고, 당시 CIA 국장이었던 존 맥콘(John McCone)이 석유회사 쉐브론의 주식 100만 달러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국 정부는 ‘국가안보에 관련된 사안’이라는 이유로 ‘마테이 암살’과 관련한 보고서를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키신저와 4차 중동전쟁, 그리고 오일쇼크
오일쇼크는 준비된 음모였다는 음모론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1973년 5월 13일, 스웨덴의 발렌베리(Wallenberg) 은행 가문의 한적한 휴양지 ‘살트셰바덴’ 섬에 세계 최고의 금융계, 정치계, 석유 메이저 거물 인사 84명이 비밀리에 모였다. 미국 측 참가자 월터 레비(Walter Levy)는 OPEC의 수입이 곧 400% 증가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이 시나리오 작성은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 안보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가 주도했다.
그 무렵 재정적자와 달러화의 가치 하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미국은 유가 상승을 원했다. 유가가 오르면 결제화폐인 달러의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모든 석유 거래는 달러로만 하고 있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달러 체제는 유가변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또 석유 메이저들 입장에서는 북해유전 개발을 위한 탐사비용이 과도하게 지출되어 당시의 유가로는 북해유전의 경제성을 맞출 수 없었다. 투자를 회수하려면 유가가 최소한 세 배는 올라줘야 했다. 여기에 세븐 시스터즈는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미국과 석유 메이저, 금융 회사들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결국 비밀회동 5개월 뒤 4차 중동전쟁 일어났고, 세계는 미증유의 ‘오일쇼크’로 대혼란에 빠진다. 시나리오대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금수와 감산조처로 석유 값은 4배 이상 뛰었다. 세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특히 제3세계 비산유국들 경제는 처참하게 무너졌으나, 세븐 시스터즈를 비롯한 뉴욕과 런던의 석유 · 금융 카르텔 세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 오일 달러는 뉴욕과 런던으로 흘러가 체이스맨해튼, 매뉴팩처러스하노버, 뱅크오브아메리카, 바클레이스, 로이즈, 미들랜드은행 등이 석유위기라는 횡재로 생긴 이익을 향유했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메워졌고, 달러 체제는 살아남았다. 또한 수지타산이 맞지 않던 영국 북해유전이 고유가 속에 살아났다. 그러나 제3세계는 기름 값 폭등과 원자재 값 폭락, 뒤이은 미국의 고금리정책으로 완전히 빚더미 위에 올라앉았다. 언제나처럼 국제통화기금(IMF)이 해결사로 등장했으나 긴축정책과 통화평가절하, 규제완화와 민영화 등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이를 통해 엄청난 부가 빈국에서 부국으로 흘러갔다. 세계 지배를 보장하는 세 가지 수단으로서 ‘전쟁과 금융, 그리고 석유’의 삼각동맹은 맹위를 떨쳤다.
메이저 기업, 수는 줄었지만 영향력은 그대로
1차 대전 이후 석유를 놓고 경쟁하던 미국과 영국은 동반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미국의 엑슨, 모빌, 쉐브론, 텍사코, 걸프와 영국계 BP, 로열더치쉘은 이른바 ‘세븐 시스터즈’로 불리는 7대 석유 메이저 기업이다.
이들은 1928년 스코틀랜드의 아크나카리에서 제3세계 석유 자원을 나누어 갖는 이른바 ‘현상유지 협정’을 맺는다. 이후 7개 석유 메이저는 세계 석유의 채굴과 정유, 판매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행사했다. 곧 이어 유가를 담합하고, 이런 지배력을 깨뜨리려는 위협에는 가차 없이 응징했다. 미국과 영국의 석유 재벌이 세계 석유 시장을 마음대로 주무른 것인데, 배후에 두 나라 정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7개 회사는 인수와 합병을 통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1999년 엑슨과 모빌이 엑슨모빌로 합병했고, 걸프석유회사는 셰브론과 BP로 나뉘어 흡수되었으며, 텍사코는 쉐브론과 합쳐졌다. 세븐 시스터즈는 현재 엑슨모빌, BP, 로열더치쉘, 쉐브론 넷만 남았다.
석유 메이저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들은 《포춘》이 2009년 발표한 글로벌 500대 기업의 상위 5위 안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 4대 메이저 석유기업의 매출 합계가 1조 5314억 달러(1838조), 이윤은 1166억 달러(140조)에 달했다. 이는 글로벌 500대 기업 전체 매출의 6.1%, 전체 이윤의 14.2%에 해당한다. 특히 석유 메이저 기업들의 절대적 이윤이 타 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석유기업은 49개로 10%에 육박한다.
미국, 에너지 위기를 국가안보 위기로 규정
2001년 3월 부시의 에너지장관인 스펜서 아브라함(Spencer Abraham)은 국가에너지관계자회의(National Energy Summit)에서 “미국은 향후 20년 중대 에너지 위기에 직면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1998년부터 이미 전체 석유 소비량의 5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데, 2025년이 되면 70%를 수입하게 될 예정이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 미국의 경제적 번영이 위협 받고, 국가안보에 문제가 있으며, 말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바뀔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2004년에 미국은 하루 국내 석유 소비량 약 2천 만 배럴 중에 60% 이상인 1300만 배럴을 캐나다,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부터 수입했다. 반면 미국 석유 생산량은 1985년 이후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또한 미국 내 주요 석유 매장지는 머지않아 고갈될 전망이다. 알래스카 지역에 있는 신규 매장지도 환경단체의 강한 반발로 제대로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주요 석유 수입 지역인 캐나다 · 멕시코 · 북해 지역 내 유전들도 향후 수십 년 내외에 고갈 사태를 맞게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에너지 위기를 국가안보 위기로 규정했다. 이에 미국 정부는 2001년 5월 ‘에너지정책보고서’와 2005년 8월 ‘에너지법’을 채택함으로써 에너지 안보문제를 국가 외교 · 경제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결정했다.
미국은 에너지 자원의 안정적 확보 문제를 단순히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안보 전략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미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새로운 에너지 공급지로 카스피 해 · 중앙아시아 지역, 서아프리카, 러시아 등을 선정했다. 특히 카스피 해 · 중앙아시아 지역은 ‘제2의 북해유전’으로 여겨질 만큼 유럽과 미국의 미래에 중요한 석유 · 가스 공급원이며, 또한 중동 지역에 대한 석유 의존도를 줄일 수 있는 대체 공급지역 중 하나다. 지리적으로 중동보다 가깝기 때문에 수송비용도 적게 들고, 무엇보다 이슬람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슬람 과격분자들이 침투하지 않고 있는 비교적 안정된 지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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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1978년 KOTRA에 입사. 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무역관을 거쳤다. 배재대학에서 유대인의 창의성과 서비스산업에 대해 가르친다. 지은 책으로는 《21세기..
출처
소금, 모피, 보석, 향신료, 석유의 공통점은 의식주와 연관된 것으로, 대부분 살아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들이다. 인류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고 문명이 발달하는 데 영향을 끼친 상품들의 과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