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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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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58, 함남 장진
사망 1925
국적 일제강점기, 한국

요약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8세 때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의 기생집에서 조방 노릇을 하다가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의 식객이 되고 그의 천거로 관계에 진출했다. 1871년(고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훈련원판관·오위도총부도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876년 1월 강화도조약 때 접견사(接見使)의 수행원으로 구로다 기요타카 일행을 접대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일본인 거물 군납업자인 오쿠라 기하치로를 알게 되어, 그와 함께 부산에 상관을 차렸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소장 오다니를 따라 경성군사령부에 있으면서 부업으로 주보를 경영해 부를 쌓았다. 그는 일본군과 함께 청나라까지 갔다가 그해 4월 서울로 돌아와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8월에 유신회를 조직하고, 곧 그 이름을 일진회로 바꾸었다. 그는 이용구와 일본 낭인들과 연계해 한일합병을 추진하면서 이용구에게 박제순 내각의 반일행위에 대한 탄핵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한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10여 일 전에 이용구와 함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합병 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진회(一進會)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제암(濟庵). 송시열의 9세손이라고 하지만 신분이 낮은 속리(屬吏)와 기생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8세 때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의 기생집에서 조방(助幇) 노릇을 하다가 당시 세도가인 민영환의 식객이 되고 그의 천거로 관계에 진출했다. 1871년(고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훈련원판관·오위도총부도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다.

1876년 1월 강화도조약 때 접견사(接見使)의 수행원으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陸] 일행을 접대했다.

이것을 인연으로 일본인 거물 군납업자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를 알게 되어, 그와 함께 부산에 상관(商館)을 차렸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을 서양 오랑캐와 동류로 보면서 그들의 물화(物貨)를 막아야 한다는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때라서 부산 시민들의 습격을 받아 상관이 불탔다. 1882년 임오군란 때도 친일파로 지목되어 집이 불탔으며, 자신은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 속에서 숨어 살았다. 갑신정변 때도 집과 세간이 불타버리고 간신히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중이던 김옥균을 암살하라는 밀명을 받고 갔다가 그의 인품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었다.

1886년 귀국 후 김옥균과의 통모 혐의로 투옥되었다. 그러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한 뒤 민비의 총애를 입어 흥해군수·양지현감을 거쳐 1891년에는 장위영영관 등을 지냈다. 그러나 조정에서 요주의인물로 인식되어 1895년에 다시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노다[野田平次郞]라고 이름을 바꾸고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야의 명사를 사귀는 한편, 양잠과 염직기술을 연구하여 야마구치 현[山口縣]에 양잠강습소를 세웠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소장 오다니[大谷喜久藏]을 따라 귀국했다. 경성군사령부에 있으면서 부업으로 주보(酒保)를 경영해 부를 쌓았다. 그는 일본군과 함께 청나라까지 갔다가 그해 4월 서울로 돌아와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8월에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鶴柱) 등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곧 그 이름을 일진회로 바꾸었으며, 전국적인 지방조직을 가진 이용구(李容九)의 진보회(進步會)를 통합했다.

일진회는 일본군의 북진을 돕기 위해 함경도지방 군수물자의 수송과 함경도에서 간도에 이르는 일대의 러시아군 동태정찰, 일본의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 대한 노역제공 등을 했다. 그는 이용구와 우치다 로헤이[內田良平], 다케다[武田節之] 같은 낭인(浪人)들과 연계해 한일합병을 추진하면서 이용구에게 박제순(朴齊淳) 내각의 반일행위에 대한 탄핵서를 제출하게 했다. 또한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10여 일 전에 이용구와 함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1907년 6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뒤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퇴위시켰다. 1909년 2월 내부대신에서 물러나 일진회의 총재가 되었다. 그뒤 다시 일본에 가서 이른바 한일연방안(韓日聯邦案)을 유세하고 다니면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에게 조선을 1억 엔에 팔겠다는 등의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사건을 계기로 일제가 합병여론을 일으키자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합방성명서〉를 비롯하여 〈상주문 上奏文〉·〈상통감서 上統監書〉·〈상내각서 上內閣書〉 등을 발표했다.

합병 후에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그뒤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지냈고, 1920년 백작이 되었다. 또한 경성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과 경기도 참사, 산업조사위원 등을 지냈다. 1921년 4월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로부터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했다. 1925년 뇌일혈로 죽었는데, 친일 산업거두 한상룡(韓相龍)이 주최한 연회에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일본왕으로부터 정삼위훈일등욱일동수장(正三位勳一等旭日桐綬章)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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