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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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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1135(인종 13)
국적 고려, 한국

요약 고려 중기의 승려.

고려 인종 때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을 내세워 자주적 기백을 떨쳤고,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하면서 부패한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개혁을 시도했다.

'묘청의 난'을 주도한 인물이다.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속성(俗姓)과 본관은 알 수 없으며, 뒤에 정심(淨心)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묘청은 1128년(인종 6)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에 파견된 백수한(白壽翰)을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했다.

그가 칭제북벌론과 서경천도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부각되기까지는 서경 출신의 문신 정지상(鄭知常)의 역할이 컸다. 정지상은 묘청의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에 근거하여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은 이미 기업(基業)이 쇠했으며 궁궐도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 남은 것이 없으니 왕기(王氣)가 있는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는 서경천도론을 제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홍이서(洪彛敍)·이중부(李仲孚)·문공인(文公仁)·임경청(林景淸) 등과 더불어 "묘청은 성현(聖賢)이고 백수한은 그 다음 가는 인물이니, 국가의 일은 모두 이들에게 자문한 뒤에 행하고 그 진청(陳請)하는 바를 들어주어야만 정사(政事)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건의하여 인종의 허락을 받았다.

왕실 고문으로 추대된 묘청은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가 있으니 이곳에 신궁(新宮 : 大華宮)을 짓고 천도하면 천하를 아우르게 되어 금나라가 저절로 와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이다"라고 하여 서경천도를 건의했다. 이같은 진언은,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불타버리고 강성해진 금나라가 압력을 가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인종의 마음을 움직여 곧 서경에 새 궁궐을 조성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1129년 낙성을 보았다. 이어 서경에 거동한 인종에게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제안했으나, 문벌귀족들의 반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1131년 왕을 설복하여 서경의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을 그려 안치시켰다. 이듬해 불타버린 개경의 궁궐을 고치려던 인종을 설득해 공사를 중지시키고 서경천도를 결정지으려 했다.

그러나 1132년 인종이 서경 거둥 도중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대혼잡을 이루고 수많은 인마(人馬)가 사상한 일을 계기로 이지저(李之底)의 천도 반대 간언과 이중(李仲)·문공유(文公裕) 등의 묘청 배척 상소, 임완(林完)의 시폐(時弊)에 대한 통론 등 개경에 기반을 둔 문벌귀족들의 서경천도 반대, 묘청 배척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 1134년 서경의 새 궁궐에 벼락이 치는 등 재난이 속출하면서 풍수도참설에 바탕을 둔 천도론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게 되었고, 천도론은 명분을 잃게 되었다. 1134년 삼중대통지누각원사(三重大通知漏刻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묘청배척파의 거두인 김부식(金富軾)이 임금의 서경 거동을 만류하는 글을 올려 인종은 마침내 서경천도를 그만둘 뜻을 밝혔다. 이같이 서경천도 계획이 개경 문신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묘청은 1135년 정월 서경에서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병부상서 유참(柳旵) 등과 함께 개경의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을 조직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다고 느낀 조광의 배신으로 부하들에게 죽고, 반란은 평서원수(平西元帥)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됨으로써 서경천도운동은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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