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

일제강점기 관청 | 브리태니커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식민주의적 한국사상(韓國史像)을 구축하기 위해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관청(→ 색인 : 일제강점기, 식민사관).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 12. 4,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로서 사업의 종류와 원칙은 이때 정해졌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는 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권중현(權重顯) 등이 임명되었다. 실제업무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교수인 쿠로이타[黑板勝美]가 총괄했으며,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대표자인 이나바[稻葉岩吉]가 편찬업무를 주관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의 주요사업은 조선사의 편찬과 이를 위한 조선사료의 수집이었다. 작업순서는 사료수집, 편찬, 기고(起稿), 초고(草稿) 정리 등으로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사의 편찬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편년사(編年史)로 한다. ② 편찬의 시대구분은 삼국 이전, 삼국시대,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전기·중기·후기(~갑오개혁)의 7편으로 한다. ③ 편찬의 문체는 일문(日文)으로 한다. ④ 사료의 수집범위는 인멸이 우려되어 갑오개혁 이후까지 한다는 것 등이었다. 심의과정에서 정만조(鄭萬朝)·이능화(李能和)·어윤적(魚允迪) 등이 단군(檀君)·기자(箕子) 등 건국신화는 민족정신발휘상 중요하며, 삼국 이전을 고대조선으로 하고 신화는 첫부분에 넣어야 할 것과, 강문(綱文)에 우리 글을 넣을 것 등을 제안했으나 일본인 위원들의 독단으로 원안 그대로 결정되었다. 사료수집은 조선사편찬위원회 직원만으로는 어려워 1923년 5월 도지사회의에서 조선사료보존에 관한 협의회를 열고 '조선사편찬에 따른 고문기·문서 등 보존에 관한 건'이라는 훈시를 내려 관민이 일치하여 대대적으로 사료를 수집할 것을 독촉했다. 이것은 일제가 '학술적이고 공평한' 조선사의 편찬과 사료의 인멸 방지를 구실로 한국의 사료를 탈취하여 한국인의 사료 접촉을 막는 작업이었으며, 나아가 이 사료를 식민사관에 입각해 취사선택하여 조선사를 편찬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편찬 작업을 더 강력히 추진하기 위해 위원회를 중심으로 1925년 조선사편수회관제를 공포하여 새로운 독립관청인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했다. 회장은 정무총감이 겸임했으며, 고문에 이완용·박영효·권중현·쿠로이타·핫도리[服部宇之吉]·나이토[內藤虎次郞], 위원에 이마니시[今西龍]·이능화·어윤적·오다[小田省吾] 등, 간사에 이나바 등 3명, 수사관에 이나바·홍희(洪熹)·후지타[藤田亮策] 등 3명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병도(李丙燾)·신석호(申奭鎬) 등이 수사관으로 참여했으며, 최남선(崔南善)도 1928년 12월 촉탁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사편수회에서의 〈조선사〉 편찬작업은 앞서 정해진 골격을 대부분 유지하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첫째, 시대구분에 있어서 앞서의 제1·2·3편을 제1편 신라통일 이전, 제2편 신라통일 이후라고 정정하여 모두 6편으로 했다. 둘째, 한국인 위원이 강력히 주장한 건국전설(단군·기자 신화)을 편년적으로 본문에 넣는 것에는 반대했으나 제4편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에 단군기사를 넣도록 했다. 셋째, 편수의 범위와 관련하여 시대구분의 시작을 신라통일 이전, 마지막을 갑오개혁으로 하는 것과 발해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왔으나 결국 수렴되지 않았다. 넷째, 최남선이 지적한 〈삼국유사〉의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 개찬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이와 같이 조선사편찬작업에 참여한 일부 한국인 학자들은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하는 명분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 자기 의견을 거의 반영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사 편찬사업은 한국인들로부터 자기 역사연구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은 것으로서, 서술의 중심은 한국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서술하기보다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며 사대주의로 일관했다거나 중국과 일본보다 역사와 문화가 뒤떨어져 있다는 데 두어졌다. 즉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점의 합법성을 입증하기 위한 사료의 취사선택·왜곡을 자행했으며,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목적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1938년까지 〈조선사〉·〈조선사료총간 朝鮮史料叢刊〉·〈조선사료집진 朝鮮史料集眞〉 등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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