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전투 [龍仁戰鬪]

조선 역사 | 브리태니커

임진왜란 때 하삼도(下三道:전라도·충청도·경상도)의 관군이 용인과 수원 사이에서 일본군과 벌인 전투.

일본군의 침략으로 1592년(선조 25) 5월 3일 한성이 함락되자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전라도군은 4만 여 명의 군사를 2대로 나누어 직산(稷山)을 목표로 북진했다. 그중 우종대는 방어사 곽영(郭嶸)이 총지휘관이 되어 조방장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아 여산·공주를 거쳐 온양으로 향했다. 좌종대는 이광이 총지휘관으로 조방장 이지시(李之詩)를 선봉장,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으로 삼아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임천(林川)을 거쳐 온양으로 향했다. 한편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100여 명의 군관과 기간병만을 이끌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여 온양에서 전라도군과 합세했다. 이들은 모두 온양에 4, 5일간 머물다가 6월 4일 용인현성의 남쪽 약 40㎞ 지점에 다다랐다. 일본군은 조선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적극적으로 대전하지 않고 한성에 구조를 요청한 후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5일 일본원병이 도착하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지시, 백광언, 고부군수 이광인(李光仁), 함열현감 정연(鄭淵)이 전사하는 등 조선의 선봉군은 패주했다. 흩어진 군사들은 이광의 본군에 수용되어 광교산 서쪽에 진을 쳤으나 군세가 불리했다. 이때 충청도군은 수원으로 전진하여 그 지역의 적을 격퇴해 연락선을 확보하려 했으나, 일본군이 4일 아침에 용인 방면으로 철수했으므로 전라도군과 합류했다. 6일 아침 이광 휘하의 조선군은 식사를 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 충청도군과 경상도군은 모두 철수했고, 전라도군 중에서도 권율의 군대만 온전할 뿐 이광과 이경록은 흩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갔다. 이 패배는 조선의 관군에 대한 기대를 절망적으로 만들고, 반면 일본군은 계속 북상하게 되었다. 이광은 패전의 책임으로 탄핵을 받고 백의종군한 뒤 의금부에 갇혔다가 유배되었다.→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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