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교린 [事大交隣]

조선 외교 | 브리태니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 및 여진을 뜻하는 말로 이들에 대한 조선 시대 외교 정책.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나라와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 방침이다. 본래 이 용어는 〈맹자〉에서 나온 말로 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이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방법을 물었는데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대(事大)와 사소(事小)가 있어 인자(仁者)라는 것은 능히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섬기는 것이고, 지자(智者)라는 것은 능히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해마다 하정사(신년 하례를 위해 파견하던 사신)·성절사(황제·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사신)·천추사(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하던 사신)·동지사(동짓달에 파견하던 사신) 등을 정기적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사대 정책을 취했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왜구 방지를 위한 평화적 회유책을, 여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회유책을 사용했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나라와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외교방침이다. 본래 이 용어는 〈맹자〉에서 나온 말로 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이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방법(交隣之道)을 물었는데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대(事大)와 사소(事小)가 있어 인자(仁者)라는 것은 능히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섬기는 것이고, 지자(智者)라는 것은 능히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에서 사대교린이 언제부터 대외관계의 용어로 같이 쓰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의 경우 〈경국대전〉에서 이전(吏典)에 승문원을 사대교린의 문서를 관장하는 관서라 하고, 예전(禮典)에는 사대라는 항목이 있다. 또 대사객(待使客)이라는 항목이 있어서 일본을 비롯하여 야인과 중국에서 오는 사신까지 다루고 있다. 그러나 1554년(명종 9)의 실록기사를 보면 "사대 문서와 교린 서계(書契)"라 하여 사대와 교린의 구분이 점차 명백해지고 있으며, 조선 후기 대외관계의 기본문헌인 〈통문관지〉에서는 사대와 교린을 명백히 구분하여 사대는 중국에 관한 것으로 교린은 일본에 관한 것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전에는 교린의 대상이었던 야인이 이때에 오면 강대해져서 청나라를 세웠으므로 이제 교린이 아닌 사대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의 내용을 보면, 조선은 개국초부터 해마다 하정사(賀正使 : 정월 초하루)·성절사(聖節使 : 황제의 생일)·천추사(千秋使 : 황태자의 생일)·동지사(冬至使) 등을 정기적으로 나라에 보냈다. 그외에 사은사(謝恩使 : 고마운 처사가 있을 때)·주청사(奏請使 : 임시로 보고할 일이 있을 때)·진하사(進賀使 : 명나라 황실에 경사가 있을 때)·진위사(陳慰使) 또는 진향사(進香使 : 명 황실에 불행이 있을 때) 등을 수시로 보냈다. 이러한 사신의 파견에는 중국황실에 보내는 방물(方物 : 貢物)이 뒤따랐는데, 이처럼 사대는 흔히 소국이 대국에 바치는 조공(朝貢)과 대국이 소국에 베푸는 책봉(冊封)으로 나타난다. 본래 중국은 선진(先秦)시대부터 천하에 천명을 받은 천자가 있고 그 아래에서 군신관계의 상하 위계서열로 세계질서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군신의 상하관계는 중국과 그 주변국가간에도 확대 적용된다. 따라서 주변국가들은 중국에 조공을 바쳤으며, 그대신 중국은 주변국가의 왕들을 책봉했다.

한편 교린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일본에 대한 것은 왜구 방지를 위한 평화적 회유책이었다. 조선은 개국초부터 대일교섭을 통하여 고려말 이후 조선의 연안뿐 아니라 내륙까지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금지를 요구했고, 일본도 조선정부의 요구에 응하는 한편 조선과의 통교를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 여진에 대한 교린도 여진족이 국경지대에서 벌여온 노략질을 못하도록 달래는 회유정책이었다. 여진의 추장들은 조선의 명예관직을 얻고, 일정한 규정에 따라 1년에 1번 혹은 수년에 1번씩 조선에 와서 국왕에게 숙배(肅拜)하여 형식상으로 종속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여진이 노린 것은 이러한 왕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역관계였으며, 조선도 이들의 교역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국경지대의 안전을 꾀했다. 이처럼 교린정책은 일종의 회유책이었으나 이것이 실패했을 때는 무력정벌을 병행했다. 여진에 대한 4군 6진의 개척이나 일본에 대한 대마도정벌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린정책은 온건과 강경, 회유와 토벌이라는 이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외교정책이다.

고등 한국사 < 고려와 조선의 성립과 발전 < 조선의 대외 관계와 양난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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