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甲午改革]

조선 역사 | 브리태니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天津]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金弘集)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7일에는 내정개혁 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회의총재(會議總裁)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유길준(兪吉濬)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사업은 일본의 간섭 정도와 개혁주체의 성격변화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약 210건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제1차 개혁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되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 30일의 의정부관제안과 8월 22일의 궁내부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고, 의정부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조선 후기 이래 유명무실화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잡았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되었으며, 관료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다음 사회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지막으로 경제부문의 개혁은 재정개혁과 화폐개혁 중심이었다. 재정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제도면에서는 12월에 신식화폐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화폐의 조선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제2차 개혁은 1894년 12월 17일 청일전쟁의 승리를 눈 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朴泳孝)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간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분장, 재정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洪範)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총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部)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部) 337군(郡)으로 개편하였다. 재정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 소의 관세사(管稅司)와 220개 소의 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군부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경무청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구성법·법관양성소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측과 고종, 왕비 민씨(명성황후)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 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태양력의 채택,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斷髮令)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내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내재적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군국기무처 , 홍범14조

朴贊勝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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